원명원, 이화원 향산공원, 벽운사 가는 날이다.
아침 일찍 원명원으로 갔다.
새벽 7시에.
보아야 할 것이 많은 날이기에.
그런 날 치고는 날씨가 흐려서 안 좋았지만
(흐린게 아니라 스모그일지도. . .분간이 안 돼요)
흐리면 덜 더우니까 그런 잇점도 있다.
스모그를 요즘 미세먼지라고번역하는 것이나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여지껏 잘 살다가 미세먼지에 갑짜기 너무들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아서",
아예 미세먼지라는 말은 무시하기로 했다.
이만큼 잘 살았으면됐지, 얼마나 더 잘 살겠다고 그, 호들갑을 떨고,
여지껏 모르고 살던 미세먼지라는 괴물을 두려워하며 방어를 하며 살아야 하겠는가.
그걸 걱정하며 사느니, 현재 주어진 기대 여명 90살에 만족하며 살겠노라.
내인생 90살이면 충분하다.
기실, 사람들이 여지껏 잘 살다가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도
TV나 신문들이 난리를 피우니까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어찌 알 것인가.
TV나 신문들은 끊임없이 국민들을 조종하고 세뇌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언론인도 극소수 있다.)
북해공원은 자금성 북쪽에 있는 것인데, 다음날 갔다.
아침 일찍 갔기에 새벽빛이라서 좀 어둑하다.
오전 7시
아침 일찍 산책, 운동하는 노인네들이 많이 나와 있다.
한가로운 배들과 수양버들. . . . . . . .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서양 세력의 침략을 받고, 청나라가 놀래서, 서양을 급히 따라가자고 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서 지은 궁전이다.
우리나라 덕수궁의 석조전에 해당한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크지만)
그러나 전란 통에 모두 불에 타서, 잔해만 남아있다.
현재는 잔해를 보존하고 있다.
복원을 할런지?
내 생각에는 그냥 잔해로 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서양식 건물을 지어놓고서
황제가 애첩과 함께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는 미로, maze-way이다.
결국 청나라의 운명은 미궁(labyrinth) 속으로 빠졌다.
원명원은 강희제때, 즉 250여년 전에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넓은 황실 정원이다.
옹정제의 별장이라. . . .
나는 옹정제의 영웅적인 행적이 좋다.
수많은 왕자들 사이에서 (권력 경쟁에서 지면 -최후의 승리자가 되지 못하면 바로 죽음이다.
왕자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끝까지 살아남아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취한 그의 지모와 용기가 보기 좋다.
글에는, 접수산방, 원명원 40경의 하나. 후기에 관윤당으로 이름을 고침.
옹정 9년 1931년에 건립.
원명원을 무한정 볼 수는 없고 (다 볼 수도 없다. 워낙 넓어서. . . )
빨리 이와원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런데 정문까지 나가는 것도 한참이다.
지도를 보니, 상당히 서쪽으로 와 있어서, 서쪽에 잇는 이화원까지는 걸어갈 수도 잇을 것 같았다.
그래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이게 문제다.
너무도 무모하다.
그게 어디라고 걷는담.
또 하루종일 봐야 할 것은 많은데,
아침에 그걸 걸으면서 기운을 따 빼다니. . . .
가도 가도 서문은 안 나온다. . .
**먹을. . . .넓기도 넓다.
지도를 우습게 본게 내 잘못이지, 어디 원명원 잘못인가.
시간을 보니 거의 한시간을 걸었다.
겨우 밖으로 빠져나와. . . .
이화원 가는 길을 물어서 또 걷는다.
중국. . .걸으러 왔쟈나. . . .
방랑시인 김삿갓 하러 왔쟈나. . . .
네 발로 와 놓고서 누구를 탓하냐. . . .
누가 가라고 했냐.
가라고 해서 갔으면 큰일 나겠네. . . .투덜
그런데, 중국 사람들도 문제다
이화원 가는 길을 물어봤으면 버스 타는 곳을 가르쳐 줘야지,
걸어가면 된다고 하니,. . .되긴 뭐가 되냐.
다시 길을 물어서
버스를 타고 서너 정거장을 가서야 비로소 이화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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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 들어가는 입구 (북문). . .
아이고. . . .
좋은 말은 다 써놨네. . . .
부강 민주, 문명, 조화, 자유, 평화, 공정, 법치, 애국, 경업(건실한 직업생활). . . .
방학때라 학생들도 많고 (줄서서 들어간다)
입장료도 제법이다.
문으로 들어서니, 다리 난간 아래로 상가들이 보인다.
이 상가 이름이 뭐더라?
아, 소주가, (쑤져우졔) 중국 소주의 거리 같다고 해서.
이화원에서도 어김없이 운동을 하고. . .
오르막길,
이 산 이름이? 만수산이래나 뭐래나. . .
원래 만수산은 정몽주의 시조에 나오는데, 여리를 말함인지?
정몽주 당시는 원말 명초였으니까, 원나라 서울도 여기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가는 길은 송당들 거쳐서 불향각으로 가는 것이다.
달려라 하니.
백탑이 여럿 있다.
이 백탑의 모양은 중국 전역에서 나타나는데, (오대산에도 많았지)
나는 이것을 티베트 풍으로만 알았는데 (물론 티벳과 몽골 불탑은 모두 이런 형태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중국 전역에서도 발견된다면
이들을 굳이 티베트 풍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이쪽으로는 밝지 못해서 잘 모르겟는데,
그것이 아니라면 티베트 불교가 몽골불교가 되었고,
그것이 원나라 불교가 되었으니,
그리고 이곳 북경은 원나라, 그리고 청나라의 수도였으니,
오히려 원나라 불교, 몽골불교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든다.
산 정상에 거대한 사찰이 있다.
가이드 북에는 절 이름은 안 나와있다.
나도 절 이름은 잃어버렸다.
그러나 크다.
아미타바~~ 성불하세요.
길상운...상서로운 구름.
문수보살님도 한자 이름으로는 묘길상님이시지. . . .
이것이 불향각이다. 이화원에서 가장 높다.
1755년 건립. 40미터.
천수 관음님이 계신데, 역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다.
아무래도 고풍을 내느라고 일부러 먼지를 안 닦는 듯하다.
한글 설명도 보인다.
내려다 보는 곤명호.
사실 어떻게 보면 곤명은 최남단 운남성의 성도이다. 곤명과 북경이 무슨 상관인가.
이것은 아마도, 이민족인 운남성을 정복하고, 그들을 지배하면서,
곤명, 운남성도 확실히 중국 것이라고 하는 제국주의적 정복야욕의 표현일 것이다.
실제로 북경이 수도인 청나라 당시에 중국은 가장 많이 그 강역을 넓혔다.
중국의 국력이 가장 강햇던 것도 청나라 당시라고 한다.
오늘날 중국이 티벳을 지배하고,
또 베이징에 호수공원을 세운다면
아마도 그 호수 이름을 랏싸라고 할 것인가. . . .
결국 티벳은 운남성의 운명을 밟을 것인가.
대패하는 걸과로 이어진다. . . .
아, 자희 태후. . .청나라를 이렇게 말아먹은 여자.
그 망녕 든 할머니 하나 때문에. . . . . .
정말 단장의 애가 끓는다.
우리나라는 또 어떠한가. . . . .
지도로 보면 북문에서 송당을 거쳐서 불향각으로 내려 (실제로는 올라) 온 것이다.
지도의 오른쪽 즉 동쪽이 궁전이 있는 곳이다.
서태후는 이곳에서 정치를 했다.
(황제가 아니기에 자금성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다가 황제 광서제를 가두어 놓고서 자기가 정치를 했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황후였는데, 자기 아들 동치제가 6살에 황제가 되어 섭정을 시작했다.
동치제도 일찍 죽고 정적인 동태후도 독살하고 나서는
자기 조카인 광서제가 황제가 되어 광서제를 여기에 유폐 시키고 더욱 노골적으로 국정을 농단했다.
여기에도 자세한 이야기가 있다.
http://blog.daum.net/thhpblogdaumnet/7827364
날씨가 흐렸는지, 스모그인지. . ..둘다 같다.
구름 밖의 하늘 향기
수많은 학생들. . . . .
이화원(頤和園의 이는 턱 이 자인데, 글짜가 특이하다.
웬 턱?
찾아보니, 기르다 봉양하다라는 뜻이 있다.
턱의 그러한 기능도 있겠지.
그러니까, 화, 조화로움을 기르는 곳. 괜찮은 이름이다.
또 주역에도 이 괘가 있다.
비슷한 뜻이다.
장랑이라고 한다. 긴 복도라는 뜻이렷다.
문설주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중국 최대의 야외미술관이라는
과정 섞인 가이드 북의 설명. 724미터.
이 돌배가 문제다.
돌로 만든 배.
이 하챦은 돌 조각품이 큰 역사를 품고 있다.
이름하여 청안방이라는 건데, (방도 배라는 뜻이다)
1755년 건륭제가 만든 것인데, 1860년 전란에 불에 타자 서태후가 다시 만들엇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전복시킬 수도 있다, 즉 백성은 왕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물에 의해 전복되지 않는 배를 만든 것이 이 돌배이다.
서태후도 백성에 의해서 왕조가 전복되지 않도록 이 돌배를 다시 만들엇는데. . . .
그러나 왕조는 역시 돌배의 소원대로
백성에 의해서 전복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외세에 의해서 전복되엇다.
문창각. . 매우 큰 건물이다.
아래 한글로 설명을 대신한다.
드디어 인수전.
서태후께서, (그리고 그 더러운 그녀의 추종자들이) 더러운 정치를 하셧던 건물이다.
담사동은 강유위와 함께 젊은 나이에 혁명(무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서태후에 의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담사동
다른 표기 언어 T'an Ssut'ung , 譚嗣同 툴바 메뉴
1865~1898. 중국의 근대 정치가·사상가.
(병) Tan Sitong .
목차
펼치기자는 복생(復生), 호는 장비(壯飛). 후난[湖南] 류양[瀏陽] 사람이다. 무술유신운동(戊戌維新運動:1898)을 주도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색인 : 무술정변). 순무(巡撫:명·청대의 지방장관) 담계순(譚繼洵)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통하고 의협심이 강했으며 서북(西北)·중원(中原)·동남(東南)의 각 성(省)을 두루 다녔다. 1894년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의 허약함에 통분하여 개혁에 뜻을 두고 신학(新學)을 적극 제창하고 변법(變法)을 선전했다. 1896년 아버지의 명으로 난징[南京]에 가서 후보지부(候補知府:府의 장관후보)가 된 후 스스로 캉유웨이[康有爲]의 사숙제자(私淑弟子:글방제자)라 칭했다.
저서로 〈인학 仁學〉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인'(仁)과 '이태'(以太)를 세계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인은 천지만물의 근원으로서 유심(唯心:관념)이며 유물(唯物)이다." 또 "이태(본래 물리학용어인 '에테르')가 세계에 충만하여 세상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과학과 종교, 유물론과 유심론, 변증법과 형이상학 등 완전히 대립되는 관점으로 채워져 잡다하고 모순된 체계를 이루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봉건군주제를 맹렬히 공격하고 봉건적인 삼강오상(三綱五常)과 도덕관념을 비판했다.
1897년 이후 후난 순무 진보잠(陳寶箴), 안찰사(按察使) 황쭌셴[黃遵憲] 등이 새로운 정치 건설에 협조하여 시무학당(時務學堂)을 설립하고 남학회(南學會)를 조직하여 〈상보 湘報〉를 창간했다. 동시에 하천을 운항하는 기선(汽船)을 만들고 철로의 보수와 광공업 사업을 추진하는 등 후난 지방에서 유신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898년 7월 청(淸)의 광서제(光緖帝)가 친히 그를 불러 4품 벼슬인 군기장경(軍機章京)에 임명했다. 그는 양예(楊銳)·임욱(林旭)·유광제(劉光第)와 함께 새로운 정치에 참여하여 군기사경경(軍機四京卿)이라 불렸고, 백일유신(百日維新) 중에 광서제를 도와 유지(諭旨:황제가 신하·백성에게 내리는 지시)를 초고(草稿)하고 장주(章奏: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글)를 비준하는 등 새로운 정치를 추진한 주요인물이 되었다. 얼마 후 서태후(西太后)가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는 옥에 갇히고 담사동은 강광인·양심수·임욱·양예·유광제 등과 함께 피살되어 '무술6군자'(戊戌六君子)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담사동 전집 譚嗣同全集〉에 전해진다.
요 인수전 앞 건물에는 경극 무대를 만들어서
서태후 할머니는 여기서 누워서 빈들빈들 경극 구경이나 하면서
간신들에 의해서 나라가 망가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셨다.
상서로운 동물이라고 하는 용과 봉황 사진이나 하나 올리고 끝내자.
안좋은 백년전 중국 역사 자꾸 애기해 봐야 뭐하냐.
오후에는 향산공원과 거기에 있는 벽운사를 갔다.
향산공원은 북경의 서쪽에 있는 대표적인 동산이다.
우리 남산처럼. . .
그건 다음 편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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