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불교)는 왜 필요한가?
종교(불교)생활은 왜 하는가?
어떤 아이가 절에 가는 할머니한테 물었다고 한다.
“할머니, 절에는 왜 가세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질문이다.
나는 지난 수십년 동안 이런 똑같은 질문을 내게 했던 때가 여러번 있었던 것 같다.
이젠 나는 또다시 같은 질문을 내게 한다.
나는 불교를 왜 하는가?
그것 없이도 잘 사는 애들도 많지 않은가.
나 스스로 그것 없이 살아도 지금보다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더 낫게 살 지도 모르겠다.
내가 불교 책을 보고, 절에 가고 그러는 것이 오히려 시간 낭비나 아닐까.
그보다는 다른 것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심지어는 불교가 아니고 차라리 개신교를 믿는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까지도 해 보았다.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고, 실제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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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이 사회에서 갖는 기능은 무엇인가.
그리고 불교가 그 개인 (불자) 에게 주는 기능, 권능은 무엇인가.
나는 종교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종교학 교과서도 찾아 보았다.
이 부분은 대체로 크게 세종류로 (세 분야로) 정리되는 듯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우선 윤리 도덕적 기능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종교는 우선 개인의도덕성을 강조하고, 사회적으로 끼칠 악에 대해서 지극히 경계 한다. 어쩌면 종교의 전재가치는 그것이 95% 이상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게 생각한다. 그것은 그 이외의 두가지는 실제로 사회적 가치로 보면 크게 가치가 없다는 뜻도 된다.
(2) 둘째 기능은, 그 우주관, 혹은 세계관, 생사관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자, 죽은자, 죽은 조상의 사후 운명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그리고 정답이든, 오답이든 어떤 답이라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원시인들에게도 종교는 있고 미개인들에게 종교는 있다. 아무리 오답이라도 인간은 그 분야에 있어서 답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답을 알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답이라고 주장하는 답주장도 수없이 많다. 그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오답이 많다는 것이고, 정답은 하나라면 대부분의 답주장은 오답이라는 듯도 된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혹은 내가 믿고 있는 정답도 객관적으로 볼 때는 (남이 볼 때는) 오답일 가능성이, 개연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눈으로 볼 때 원시인들의 믿음은 매우 유치했고, 오류였다. 그렇게 보면 천년후 과학이 한껏 밝혀진 후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매우 유치하게 보일 것이고, 그대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 대부분은 오답을 믿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답을 요구한다는 행태가 아이러니이기도 하고, 딱하게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그 정답이라는 것이 지극히 얻기 어렵기 때문에 ( 일단 사후세게가 증명되기 어렵고) 지극히 사이비가 판치기 쉽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이비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대부분의 신비주의가 여기에 속한다고 본다. 신비주의라는 풍토에 바로 사이비가 배태되고 성장하고 판을 치는 풍토가 조성되는 것이다. 이분야 자체가 정답이 나오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에 그래서나는 누가 이것이 정답이다 (사후세계가 이렇다, 우주의 원리가 이렇다, 어떤 존재가 인간을 창조했다, 어떤 존재가 인간을 심판한다. . . .앞날을 예언할 수 있다, 지구멸망이 언제 온다. . . 이런 수많은 주장들) 라는 것을 나는 일단 믿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신비주의를 배격한다는 말이고, 나느 일단 신비주의자는 사기꾼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대개는 인간의 그런 나약한 면을 이용하고자 하는 나ㅃ느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이용이란 물질적 이득은 물론이지만, 교주로서의 혹은 사부로서의 명망을 얻고 싶다든지 그런것들이다. 그것은 부당한 권력이다.)
종교란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할 수 엇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는 종교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그런 나 뿐만이 아니다. 종교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것으로 각인되어 왔다. 어쩌면 그 사람들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 기도라면 어떤 것일까. 이런 막연한 어떤 힘에 의지하는 것이니까,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3)종교의 세번째 기능은 무엇일까.
우주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준다? 그렇다면 2번과의 차이는? 맹목적 신앙과 주체적 극복의 차이? 스스로가 성자가 되고 현자가 되어야 한다는 기능이다. 즉, 성자와 현자를 기르는 기능이다. 종교생활의 목표는 이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성자나 현자라는 말이 추상적이고 내용이 없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어쨎거나 인간으로서 가장 훌륭하게 모범적으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도덕률만으로는 미흡하며 종교적인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가치가 있을까? 그러 가치체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이고, 나로서는 불교가 그럴만 한 가치체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나 이슬람도 그에 버금가는 가치체계는 있을 것이다. 다만 내 생각에 불교의 가치체계보다는 약간 함량이 미달될 뿐, 부류에 있어서는 같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이 무 유사하거나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동양에서도 유불선 삼교가 다르지 않다고 하는 사상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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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근거로 해서 지금의 종교행태들을 평가해 본다면 어떠할까.
(2)와 관련하여
나는 2번에 해당하는 것에는 별로 가치를 두고싶지 않다. 그리고 그것(신비주의) 에는 너무도 많은 사기가 판을 치고 있고,. 판을 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에 해롭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비주의 자체를 혐오한다.
그런데, 맹목적인 거대한 힘에 의지해서 구원을 빌고 의지, 귀의를 비는 것은 어떠한가? 그것에는 순기능이 있지 아니한가? 이것도 2번 부류에 해당될 것 같은데?
그 점은 인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 신앙의 대상이 누구라도 거대한 힘에만 의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세음보살님께 의지하는 것이나 하나님, 예수님 마리아에 의지하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절에서 기도하는 보살님들의 마음에는 그것이 (대상이) 누구이든, 자기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분이시면 되는 것이고, 힘쎈 분이면 되는 것이다. 가끔 나는 기독교도들이 불교를 그토록 헐뜻고, 또 그에 대해서 보살님들은 교회를 매우 좋지 않게 보지만, 실제로 본질적으로 이분들이 기도하는 대상과 내용에 있어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리라고 본다. 기독교나 불교나 교리를 잘 알아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고, 기도를 열심히 해서 구원을 얻거나 의지가 되거나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 대상에 있어서 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불자가 해야 할 일이 그런 것이었다고 말씀하셨는지는 지극히 의문이다. 물론 그런 생활도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종교생활의 모범도 아니고, 불교 수행의 본령도 아닐 것이라는 말씀이다.
부처님은 게를 잘 지키고, 명상을 열심히 하고, 자비행을 열심히 해서 깨달으라고 하셨지, 자기에게 열심히 의지하면 된다고 하시지는 않으셨다는 거다. 그러니까, 불교가 기도불교가 되어서는 않된다고 하는 것인데, 그러나 실상은 대부분이 기도불교이다. 그리고 기독교도 대부분 기도 기독교이다.
그것이 사회에 해를 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종교의 가치란 그런 것은 아니다. 종교가 그런 것이라면 처음부터 내가 종교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도 않앗을 것이다.
많은 스님들도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스스로가 석가모니 같은 성인이 되고자 출가한 것이지, 보살님들의 기도나 대행해 주기 위해서 출가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3)과 관련하여
3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법답게 수행해야 할 것이 전제된다. 이 점은 나 자신의 과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내가 수행해야 하는 문제이지 누구를 평가하거나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 종교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는 여기에 다라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가 없는 종교라면, 그런 종교집단이라면 존재 의의가 없을 것이다. 불교의 존재 가치라면 불교가 얼마나 열심히 수행을 하는가, 그리고 불교가 얼마나 자비행을 열심히 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더 이상 어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기도 대신 해 주고, 목탁 쳐 주고 재 지내 주는 것이 불교가 해야 할 본령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1)과 관련하여
종교의 기능 중에서 사회도덕을 유지하고 교육하는 기능이 있다.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도덕을 가르치고 도덕을 모범 보이는 사람은 자기 부터가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이지 않은 성직자, 종교인은 기본적으로 종교인일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인에게서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또 그래서 사람들으 종교인을 존경하는 것이다.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이 종교인 생활을 하는 것은, 양의 탈을 쓴 이리이고, 양고기 집에서 파는 개고기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든, 기독교든, 종단에서는 성직자가 얼마나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지 수시로 점거할 필요도 있고, 제재를 가할 필요도 있다. 그렇지 않고, 어떤 종교 성직자가 부도덕하다고 한다면 바로 그 종교는 설 땅을 잃어버리게 되고 사기집단으로 전락할 뿐이다.
2012.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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