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감별법
김 광 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한양여자대학교 교수)
나라의 큰일도 해결해야 하지만 종단 내부의 적폐(積弊)를 일소하는 문제도 시급하다, 적폐 해소가 박근혜 퇴진과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우선 박근혜 퇴진에 총력을 모아야 하느냐를 요즘 불교 조직에서 논의한다고 한다. 그만큼 종단내 적폐 해소(解消)는 시급한 문제라는 뜻이렷다. 이렇게 종단내 적폐 해소에 그토록 여러분들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현금하 종단 내 적폐의 대표적인 일은, 그야 물론 교계언론 탄압이다. 그런데 대개는 이른바 큰스님이라고 불리우는 분들께서 바로 그 언론탄압, 즉 해종(害宗) 언론 탄압, 해종 인사 탄압에 적극적이신 것 같다. 그래서 우선 어느 분들이 큰스님이신지 차제에 분명한 감별이 필요할 듯 하다.
1. 엘마 간트리
해마다 새해가 되면 조계종에서 가장 추앙 받는다는 종정(宗正)님의 신년 멧시지가 나오고, 부처님 오신날에는 또 불탄 멧시지가 나온다. 그런데, 이런 큰스님의 고졸하신 법문이 언론사 기자들의 술자리에서는 코메디 거리로 떠오른다고 한다. 즉, 이 분께서 “얼마나 세상 물정을 모르시고 이런 엉뚱한 소리만 해 대는가”라고 비꼬는 것이다. 가까운 친구 중에 언론사 기자가 몇명 있는데, 이들이 내게 해 주는 이야기이다.
또 오래 전 조계사에서 열린 신년 초하루 법회에 갔었는데, 총무원장 oo스님께서 법문하시기를, 불경에 나오는 극미진(極微塵)이 얼마나 작은 크기인가를 설명하시면서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벼룩" 보다 몇배 작다는 얘기로 한시간 이상을 끄시다가 그만 그렇게 법문을 끝내고 내려오셨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 스님을 존경한다. 그분만큼 공부하시고, 그분만큼 원만하게 종단을 이끄신 분도 흔치 않다. 다만 대한불교 조계종의 분위기가 이렇다는 것이다.
한편, 내가 자주 드는 예(例)이지만, “엘마 간트리”라는 영화가 있다. 아마 1960년대 미국영화일 것이다. 어느 일요일 오후 EBS에서 본 것인데, 주인공 엘마 간트리(Elmer Gantry)는 사실 사기꾼인데, 어쩌다 보니 자신이 목사라고 사기를 치게 되어, 할 수 없이 목사 흉내를 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제법 설교도 하게 되었고, 때로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감동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스스로도 자기가 목사인 듯한 생각 속에 살게 되었고, 어느덧 그는 대단히 유명한 목사가 되게 된다. 사실 실제 목사라고 해도 그이보다 크게 다를 바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결말에서는 (영화의 재미를 위해서) 엘마 간트리가 몰락하는 것으로 파국을 그렸지만, 오히려 그것이 현실이라면 몰락하지 않고 끝내 그는 유명한 목사님으로 생을 마쳤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스님이나 목사가 우리 주위에도 상당히 많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 제 말씀의 주제는 그에 대한 개탄 아니라, “종교적인 일에서는 왜 이런 일이 가능한가”이다.
2. 말로만?
세상에 좋은 “말”은 얼마든지 많다. 인생의 교훈에 관한 서적은 넘쳐 나고, 종교를 믿고 전파한다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가 거짓말 하지 말고, 부지런히 살고, 만족(滿足)하며 살고, 용서하며 살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고, 어려서부터 많이도 배웠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라는 책도 있다. 유치원이 아니라 넉넉하게 보아 초등학교 때 다 배웠다고나 해 두자. 또 우리가 그런 좋은 얘기를 다른 어느 누구에게, 혹은 대중에게 못할 것도 없다.
그런데, “누가 종교적으로 얼마나 훌륭하냐 아니냐”는 대개 “말재주가 얼마나 있느냐, 법회를 (목회를) 얼마나 재미있게 하느냐”로 정해진다. 그리고 그분이 “그 교단에서 얼마나 권위있는 자리에 있느냐”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유독 다른 분야보다 종교계에서는 실력보다는 "권위"와 "지위"가 중요시되기도 한다. 권위(權威)와 지위(地位)에 의해서 위계가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조폭과도 비슷하다. 다만 조폭(組爆)에는 그래도 주먹이라는 실력체계가 있다. 하지만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분이 훌륭한 성인(聖人)은 아닌 것이, 그런 정도의 좋은 말씀쯤은 보통 사람들도 웬만하면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듣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인데, 여기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란 바로 종단(교단) 혹은 문중 내의 권위를 뜻하는 것이렷다.
3. 성자의 기준
그렇다면 (불자의 한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건대) “종교적인 진정한 가치”란 없는 것일까? 있다면 또 그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실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기도 어렵지만, 거기에도 여러가지 견해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런 논란들을 다 챙기고 나가자면 논의는 끝이 없다. 그러니, 어렵게 이야기하지 말고, 그냥 보통 불자가 “그저 받아들일만한 내용”으로 짚어 나가 보기로 하자.
일단 이상적인 불교적 능력이란, 도력(道力), 혹은 “얼마나 깨달았느냐”인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측정되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언행(言行)으로 간접 측정되는 것인데, 거기에는 견해차가 너무 많고, 종파적 차이가 너무 심하다. 흔한 말로 도력을 측정하는 "도력 메타기(道力meter機)"는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판단의 간접적 기준이 쓰이게 되는데. . . . .
① 그 첫 번째 것으로, “얼마나 그가 열심히 (치열히) 수행하(했)느냐”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겠다. 성철스님이나, 혜암스님, 효봉스님 등이 그런 반열에 들겠다. 이 판단기준에는 소위 장좌불와(長坐不臥), 일종식(一種食), 수십 안거(安居) 등이 평가기준이 된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판단기준이 되는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잠 안 잤다는 것과 그 사람이 성자라는 것과는 상당한 개연성의 거리가 있겠다. 흔히 이런 것을 비꼬아서, 장좌불와 해서 부처가 된다면 서서 잠을 자는 “기린”은 벌써 부처가 됐겠다는 농담도 회자(膾炙)된다. 기린이 아니라 “절구통”으로 바꾸어도 된다.
② 두번째 간접 판단기준으로, 그 사람의 언행이 (주로 법문이) 얼마나 듣는 사람이게 감동(感動)을 주느냐가 있겠는데, 나름대로 판단기준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는 유효하기도 하다. 일례를 들어, 베트남 스님 틱낫한(釋一行)이나, 혹은 달라이 라마(Dalai Lama)의 글들은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나 역시 글이나 법문만으로는 얼마든지 사기(詐欺)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것도 그리 믿을만한 기준은 못된다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라즈니쉬(Rajnish)의 글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가 집단적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집단섹스(sex)를 조장한다든지, 환각제를 권장한다든지 기이한 방법으로 황홀경을 유도해서 자기 집단들 내부에서만 스스로 깨달았다고 착각하도록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실망하지 않았던가.
혹은 요즘도 우리나라에서 여러가지 신인(神人), 계시받은 사람, 도인, 깨달으신 분이라는 주장으로 책도 팔리고, 법회도 선전되고, 또 그것이 인터넷에도 광고가 오르는데, 거기 미친 (혹은 그 과정에서 어떤 이득을 보는, 혹은 착각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옳을 지 오르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볼 때는 그런 사람들이 성자는 아닌 것이다.
③ 세번째가 그 사람의 평소의 행위나 이룩한 업적을 보아서 판단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비교적 성자(聖者)를 판단하는 현실적이고 합당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되겠다. 그렇기에 성인이란 그 사람의 깨달은 경지나 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행적(行績)에 의한 것, 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요한 부분이다.
4. 큰스님이란
이 세 번째 기준-행위나 업적으로 성자(聖者)임을 판단하자는-을 놓고 생각해 보자. 깨달음이란, "경지라는 것-일종의 상태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동작과 행위, 실천하는 일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불교의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판단기준에서 볼 때 정작 그러한 성인의 반열에 들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거의 없다는 것이 이제 현실적인 고민이다. 많지 않은 예지만 그 예들을 들어보면, 자신의 안일(安逸)과 입신(立身)을 생각하지 않고, 평생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선우경식 병원장이나 (그는 천주교의 믿음에 따라서 행동했다고 한다), 혹은 살신성인의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했다고 하는 테레사 수녀나, 혹은 간디나, 만해(萬海)스님, 혹은 죽을 각오로 남북통일을 위해서 휴전선을 넘어간 문익환 목사님의 거룩한 행동 들이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위대한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성인이라고 보자면 바로 이런 판단 기준에 합당하다면 성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적 없이, 말로, 혹은 주장으로, 혹은 신도 조직의 교세(敎勢)로 성인, 도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대개 오답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비록 엘마 간트리(Elmer Gantry-영화에서는 버트 랑카스타가 주연을 했다) 같은 사기꾼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별로 성인이 아니면서 성인이라고 주장하는 (그리고 추앙받는) 그런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너무도 많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자기 집단 내에서, 자기 교회 내에서, 자기 사찰 내에서 성인이 되기가 너무 쉽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큰스님이라는 말이 너무 남발되고, 또한 큰스님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거나 그것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수도 많지 않은가 말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서, 나는 여러 목사님들이 훌륭하다고 해도 별로 그 분들을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요즘에는 대부분 한 절의 주지만 하여도 너나없이 그 절에서는 “큰스님”이라는 칭호를 받는데, 나도 역시 다른 분들처럼, 그런 현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 유명한 법정(法頂)스님도 “큰스님”이라는 말이 너무 남발됨을 여러차례 개탄하셨다. 그러니, 내 말에 기분 나쁘신 분은 나를 탓할 것이 아니라 법정스님을 탓할 일이다. 부디 “큰스님”이라는 단어는 찬사가 아니고 비꼬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는 뜻이다.
5. 왜?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도인(道人)이 아닌 사람들을 도인으로 만들려고 할까? 이게 오늘의 주제이다. 주제가 좀 늦게 나왔다.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이 좋아서?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 아닌 게 없으니까? 그럼 그런 사람들이 왜 자기 부모님은 천대하고, 직장 동료는 미워하면서 하필 그 스님한테만 "큰스님"이라고 하는가? 왜 이웃돕기는 그리도 아까워하고 주저하면서 큰스님 가사에는 몇백만 원씩을 쓰는가?
나는 좀 유명한 스님이라고 하시는 분들 법회에는 가볼 엄두가 나지를 않는다. 물론 가 보았자 결국 극미진(極微塵)보다 107 배나 큰 벼룩이 얘기나, 혹은 자기 옛날 절에 있을 때의 만담(漫談) 같은 얘기나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그 자리에 보살님들이나 신도님들이 너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자리에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다. 참 그런 벼룩이 얘기들을 들으러 열성스럽게도 모이는구나 싶기도 한다. 비록 내가 불자이지만, 스님들에 비해서 목사님들은 그나마 목회 준비라도 열심히 해 온다고 느껴진다.
그럼에도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모이게 하는가? 무엇이 평범한 성직자를 너나없이 성자, 큰스님으로 만드는가” 생각해 보면, 이는 결국 사람들이 그분들로부터 "좋은 복(福)을 많이 받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싶다. 내가 복을 많이 받으려면 우리 스님이 큰스님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사실(fact)이 아니고, 요청(asking)이고 희망사항이다. 초야(草野)에서 훌륭히 수행하고 계시는 덕높은 스님들도 많은데, 오히려 법문의 내용과는 별로 관계없이 유독 유명하다는 스님들에게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그게 '유명하다'는 말과 동어반복이지만) 결국은 “복 받겠다”는 이기적(利己的)인 이유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스님께서 신도들에게 해 줄 말씀이란 “수행(修行)을 열심히 하라”거나, “선행(善行)을 잘 하거나, 자기 마음관리를 잘하라”는 말씀이어야 할 텐데, 그와는 별로 관계없는 신변잡담이나 하고 내려감에도 법문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분이 “유명한 스님”인 기이(奇異)한 현상은, 그 인기의 이유가 바로 “진리(眞理)와 선행(善行)”에 있지 않고 "유명세에서 나오는 복(福)"이라는 이기적인 이유(利己的理由)에서라는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결국 자기가 모시는 스님이, 자기 목사님이, 자기 교주(敎主)님이 훌륭한 분이라야 자기가 큰 복과 은총과 가르침을 받은 것이 된다고 볼 터이다. 똥걸레로 만든 분소의(糞掃衣)를 입어야 훌륭한 스님임에도 수백만원짜리 가사를 자기 큰스님께 올리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6. 팔불출
그러나, 그런 행위는 (아주 좋게 보아서) 속인들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하자.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다. 사람들에게는 그런 어리석은 마음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보아주고 넘어가자. 신도님들은 그냥 그렇다고 봐 주자. 자기 자식 자랑 하듯이 자기 스님만이 최고라고 하고 백만원짜리 가사 해 드리는 것도, 그것도 일종의 팔불출 정도로 치부할 수 있겠다. 자기 자식 자랑하는 것이 팔불출이언정 죄악이라거나, 해서는 안될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 신도님에게는 자기 스님의 잘남은 진실로 믿는 바가 되겠다.
그러나 한편, 그러한 팔불출의 태도를 받는 스님이 그것을 그대로 믿는 다면 -진정으로 자신이 큰스님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건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한 칭송을 받는 사람, 즉 스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떤 신도가 자기를 ‘육신보살이다’ ‘생불이다’, ‘한소식 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칭송을 하더라도, 그건 “그 신도님이 유명하고 훌륭한 스님을 잘 알고 모신다”는 생각으로, 또 “그를 모셔서 복을 많이 받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스님께서 그것을 “진짜”이라고 착각하신다면- 즉 자기가 정말 잘나서 그 신도님들이 그러는 줄 안다면- 지극히 심한 팔불출이 되겠다. 그러니 정당한 수행자라면 적어도 그런 사람들(신도들, 자기숭배자)의 말은 한 1/10 정도로 감하고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집단적인 판단의 편파성이 약 10배 정도 된다고 계산해 보아서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수행자라면 실제보다도 더욱 겸허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누가 자기보고 뭐라고 한다고 해도 전혀 그것은 신도님들의 자기 이기적인 동기(구복신앙)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될 것이다.
7. 봉은사 경험
하물며, 누가 자기에게 삼배를 안 해 준다고 한다든지, 존경하는 언사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기분나빠 한다든지, 그 사람을 고깝게 본다고 하는 스님들이 아직도 많다는데, 그는 그야말로 종교인의 기본을 망각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겪은 경험을 한가지 들자면, 오래전에 봉은사(奉恩寺)에서 그런 분한테, 무슨 부장 스님한테 삼배(三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 배만 했다) 신도증을 받지 못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딱 10년전 이야기다.
그리고, 신도나 성도들 또한 자기 종교집단(소집단, 교회, 절 門中)에서 모시는 스님이나 목사님, 지도자를 자신들이 숭배하듯이 다른 집단 사람들도 그 스님을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긴다면 그것도 팔불출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한 (개인과 소집단의) 이기적인 동기에 의한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불교 집안에서 많은 스님들이 “큰스님” 소리에 안주해서 노력, 수행, 실천하지 않는 데는 신도들의 맹목적 구복행위에도 큰 원인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스님을 타락시키고 방일하게 만드는 데는 신도님들 책임도 좀 있다는 뜻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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