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강소성(江蘇省) 揚州(양주) 觀光.1
양주(揚州.양저우)란 어떤 곳?
중국 강소성 양주시는 소주(蘇州), 항주(杭州)와 더불어 예향(藝鄕) 3주라 부를 만큼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작은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양주 외에 장주(蔣州), 광릉(廣陵), 강도(江都) 등으로 불리어 왔으며 우리 역사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면서 나라가 기울어 마지막에는 이곳으로 도망 와 최후를 맞이한 수양제.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더 직접적으로는 신라의 최치원선생이 이곳에서 벼슬생활을 했으며 천하명문으로 역사에 남아있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바로 이곳에서 쓴 것이다. 옛날 당나라 성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당성(唐城)유지(遺址)가 있으며 거기에는 최치원기념관이 있다. 우리나라 관광객이라면 꼭 들려보아야 할 곳이다.
신라와 당나라의 교류가 번성했을 때는 신라.일본 등지에서 수백 명씩 학생.스님.상인 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항주에서 북경을 연결한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수양제가 완성했으며 이로 인해 양주는 더욱 발전했고 성당시대에는 아랍상인이 무려 5천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송나라 말기에는 금나라와 원나라에 대항해 싸우는 중요한 전쟁터가 되어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명나라 때는 다시 흥성했으나 청나라가 쳐들어오면서 양주는 다시 치열한 싸움터가 되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때 양주 사수 10일 동안 전쟁을 지휘했던 명나라 장수 사가법의 묘와 기념관이 이곳에 있다.
청나라 때는 강희, 건륭황제가 자주 남순(남쪽 순례)을 하면서 오래 이곳에 머물렀고 그로 인해 옛날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예향3주의 하나가 되었다. 건륭황제의 수상유람코스는 수서호에 가서 되밟을 수 있고 이 호수의 아름다움은 현재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유명한 곳이다.
1842년 아편전쟁으로 인해 상해가 개항하면서 양주는 지리적으로 낙후한 곳이 되었고 새로운 도로의 건설로 인해 경항대운하의 중요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양주도 차츰 낙후를 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1949년 신중국 이후 옛날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힘써서 역사문화명성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음은 물론 새로운 공업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추어 가고 있다.
양주 풍경.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 곳: 이하 사진 3장
1.수서호(瘦西湖)
양주관광의 첫째는 뭐라고 해도 수서호다. 수서호는 청나라 때 건륭황제가 6번을 찾아와 몇 달씩 놀다가 간 곳이기도 하다. 그 유람의 길을 따라 지금도 수상관광은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이 코스는 1991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유람선을 탄 적이 있었다.
수서호의 원래 이름은 장춘하(長春河)였는데 항주의 서호보다 작고 홀쭉하다 하여 여윌 수혹은 수척할 수(瘦)를 붙여 수서호가 된 것이다. 항주의 서호보다 더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황제가 6번이나 한곳에 와 머물러 있었으니 그 경관의 완성에 얼마나 큰 힘을 쏟았겠는가. 수서호는 건륭황제로 인해 아름다운 자태를 갖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서호에는 수많은 건물과 다리와 수목들이 있다. 특히 양주의 시수(市樹)인 수양버들이 우거진 풍경은 수서호의 또다른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문인들이나 화가들이 이곳을 찾아 양주나 수서호의 아름다움을 �거나 그린 사람은 수없이 많다. 이백.백거이.맹호연.두목.구양수.소식 등 시인이나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홍루몽(紅樓夢)>의 작가 조설근(曺雪芹)은 소설속에서도 이곳을 배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양주의 화가들 ‘팔괴(八怪)’는 이곳을 그리고 양주에서 활동했다.
수서호의 대표적인 아름다움 - 오정교
운무속의 오정교
이름도 이상한 28교. 수나라 양제가 달밤에 이곳에서 28명의 궁녀들과
연회를 베풀었던 곳. 그래서 다리 이름도 28교.
유람선에서 노를 저으면서 안내도 하는 아가씨.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건륭황제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걸로 봐서
황제들이 이곳을 얼마나 좋아했느냐,
또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리라.
호수와 유람선
맑은 날의 오정교
수서호에서 바라보이는 백탑. 건륭황제가 이곳에 왔을 때
3일만에 지은 것이라 한다.
호수와 유람선
찻집 풍경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모택동이 쓴 것을 새긴 비석.
오정교와 백탑의 원경
수향이라고 일컫는 강남에는 어디를 가나 다리가 많다.
이곳에도 많은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
백탑이 보이는 풍경
다리가 있는 풍경
봄꽃이 활짝 핀 풍경(위. 아래)
다리가 있는 풍경
이하 수서호 풍경들
강남에는 연꽃이 많다.
이하.이런저런 풍경들
2. 양주당성유지박물관(揚州唐城遺址博物館)
(최치원기념관)
당나라시대의 성과 유물을 감상하고 최치원선생이 벼슬하고 근무했던 곳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성안에는 당나라시대에 절도사가 지었던 연화각(延和閣)을 1979년에 다시 지어 그 1층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2층에는 최치원선생의 기념관이 있다.
사진자료와 그림자료, 그리고 최치원선생의 흉상이 있는 아주 단순한 기념관이지만, 이 기념관을 훑어보는 우리의 기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최치원선생은 이곳에서 ‘토황소격문’을 비롯해서 중앙에 올리는 글 등 수많은 글들을 썼는데 그 중에서 뽑아 편찬한 책이 그 유명한 <계원필경(桂苑筆耕)>이다.
신라말에 귀국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채 한 동안 지방관으로 있다가 해인사로 들어간 몇 년 후 행방을 감추었다.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태수로 있을 때는 해마다 홍수피해를 입는 사람들을 위해 인공림을 조성하여 물길을 돌리고 홍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 바로 함양에 있는 ‘상림숲’이다.
상림숲에 가면 최치원선생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고 함양과 인연이 있는 역사의 인물들의 흉상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다. 그러나 최치원기념관이 있어야 할 가장 좋은 곳인 함양 상림숲에도 최치원기념관은 없다. 그런데 중국 양주에는 있다.
입구에서 바라본 당성유지
유지와 박물관,최치원기념관에 들어가기
유지박물관의 문을 들어서면
연화각 건물. 1층에는 박물관, 2층에는 최치원기념관. 당나라 시대에도 있었던
건물이지만 없어진 것을 현대에 들어와 다시 지었다.
연화각 현판
연화각 표지석
래자신라적우호사자
최치원여양주
스스로 찾아온 신라의 우호 사신
최치원과 양주
최치원흉상. 이흉상은 최치원선생이 이곳에서 벼슬살이 하기 전에 현재의 남경
옆 도시인 율수라는 고을에서 현위로 근무했었다. 이곳에는 최치원동상이 있는데
그것과 같게 만든 것이라 한다.
최치원 선생의 초상화. 2점
최치원선생의 글씨로 만든 병풍
최치원선생의 입당에서 과거급제와 벼슬살이 후 귀국까지의 과정을 정리
이하. 당성에 올라서 본 풍경들
당성유지 한 쪽에는 최치원기념관을 별관으로 지을 터가 마련되어 있다.
2006년 6월 현재도 이 푯말만 쓸쓸하게 서 있었다
경주최씨종친회에서 2004년 10월 15일에 이렇게 표시해 두었다.
이하. 당성유지박물관의 전시된 유물 몇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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