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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내륙 19. (2015. 8.1. 토) - 사천성 성도-두보초당, 청양궁

원 통 2016. 1. 26. 22:38

중국내륙 19. (2015. 8.1. ) - 사천성 성도

 

사천성은 원래 강이 네 개라서 사천성이다. 삼성퇴(三星堆)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황하 문명과는 다른 갈래의 독자적 청동기 문화인 사천 문명의 중심지였다. 221년 유비는 이곳에 촉한을 세워 263년까지 계속되었다. 촉이 조조가 세운 위나라에 의해 소멸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염(司馬炎)은 위를 차지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때부터가 중국 역사에서의 위진남북조 시대이다.

그런데 삼국지에서는 이 지방(촉한, 혹은 파촉) 지방이 마치 불모지나 사람들이 몰랐던 땅처럼 (제갈량 등에 의해서 처음으로 개발된 듯이) 묘사되고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물론, 진시황이 전체 중국을 통일한 진()대에도 이곳에는 정치권력이 있었고, 진에 의해서 촉, 혹은 촉한으로 행정권력이 미쳤다. (시안 까지의 교통은 좀 불편했겠지만)

지리적으로 보면 중심 지역은 촉()이고, ()나라와 한나라(西漢)의 수도엿던 西安(시안)과 촉 지방의 사이에는 한중(漢中)이 있다. 한수가 지나는 지역이고, 훗날 한나라의 유방이 봉토를 받아 한왕으로 제수된 지역이 한중이다. 교통은 물론 나쁘고 지리는 험악하다. 그러니 제갈량이 노렸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름으로 관중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의 서울인 시안 지역을 말한다. 동에서 서로, 즉 낙양에서 함곡관을 넘어서면 거기부터가 관중이다.)

암튼, 그래서 이 지방이 예로부터 촉한(蜀漢)이라고 불리운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서, 유비가 촉한지방을 차지하고 촉나라를 일으킬 때 이 지방을 촉한이라고 한 것은, 유비가 한나라 황실의 후예라서 촉한이 된 것이 아니라, 유비의 최고 조상인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한왕이었고, 그가 한왕인 것은 이 지방이 한중 지방이라서 그랬던 것이다.

, 이 지방은 유비 혹은 유방 이전에도 이지방 이름이 한()인 것이다.

결국 유비는 자기나라 이름을 다시 한()이라고 하지는 못하고, ()이라고 지었다. 비록 제갈량과 운명을 같이하게 된 42년 동안이었지만.

 

삼국지 이전, 즉 서한(西漢) 시기로부터 이 지역은 빠르게 발전하여 번영의 수준이 관중 지역을 넘어서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불리었다. 그래서지금도 이지역은 스스로 천부지국이라고 부른다. 성도가 도읍이 된 것은, 서한 말, 익주(益州)를 점거한 공손술(公孫述)이 국호를 성가(成家)라 하고 성도에 도읍을 세운 이후이다. , 제갈량과 유비는 이 공손술의 성가국을 접수해서 촉을 세운 것이다.

 

시안에서 촉한 가는 길은 당나라 때에 다시한번 유명해 지는데, 양귀비와 안록산의 실정과 반란으로 당현종이 안록산과 한께 도망가던 길이 이 한중 길이다. 양귀비는 중간에 마외역(馬嵬驛)에서 스스로 자결한다. 이 시안에서 파촉 까지의 길이 험하여 잔도(棧道)만이 유일한 길인데 (당시에는) 절벽에 나무 부스러기로 엵어매어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은 관고아 콧그로이용되는 가본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한편, 이 지방을 파촉이라곧 부르는데, () 지방은 촉의 서남쪽이다. , 촉의 북쪽은 한중, 남서쪽은 파()이다. 한가지 (한국 여행자가) 주의할 것은 이 촉()의 중국말 발음이 슈(shu 3)이기 때문에 도로표지판이나 안내판을 볼 때 틀릴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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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서의 일정은 만 이틀이다.

 http://blog.daum.net/wonthong1/15411777

 

아침에 YH 문을 나선다.

유스호스텔이 화궈  집을 함께 경영하는 것 같다.

사실 중국의 유스호스텔이 이렇게  전문적 경영인에 의해서 운영되는 곳은 거의 없다. 

아니면 친한 사람 사이에 장소를 같이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국과학원  부속병원이 상당히 크다. 

중국에서는 다 의원이라고 한다. 병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두보 초당 가는 길.

두보는 이곳 두보초당에서 6년을 살았다고 한다. (AD 759-765)

그런데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시를 지었다.

사실 두보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는데, (그의 식솔들도 그를 따라서 모두 평생 방황하였다)

그래도 여기 성도의 작은 초가집에서 살 때가 그나마 가장 안정적이엇다고 한다.

두보는 쓰러져가는 나라(당나라 말기 안록산의 난 때)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평생을 길바닥에서 보냈다. (그 가족들의 고초야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나는 두보에 대해서 학교 시절부터 그의 시를 너무도 좋아했기에 그에 대한 생각은 각별했는데, 

여행을 다녀온 계기로 두보의 전기를 읽었는데, (유영재  선생도 함께 읽었다)

함께 감명을 깊이 느꼈다.  은 안록산의 시대를 지냈는데도 그만큼 민중의 고통과 나라의 운명에 대한 걱정을 절절히 읊어낸 시인은 없는 것이다. 


그의 시 등고(登高-높이 오르다)에 "간난에 서리같은 귀밑머리 어지러움을 심히 슬허 하노니. . ."하는 귀절은 학교때부터 외우던 귀절이거니와, 

나는 그가 나그네 신세로 병을 앓다가 동정호의 조각배에서 병들어 죽었다는 정황을 생각할 때면

남의 일같지 않게 슬픔이 벅차오른다.   

불우한 시인이 그래도 몇년동안 이 초막에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던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성도 시는 (사천성은?)  이곳을 유명한 관광지화하여 크게 단장하고,

높은 입장료를 받고 있다.


 





 두보의 초가집 오두막집 터를 발굴하여서 보여준다.





태극권




두보는 살아서는 이런 영화를 못 누렸다.


두보 초당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양궁으로 향한다.

버스에서 창밖을 보니 치과의원이 있다.  그런데. . .


치과의원이 한국 치과 못지않게 (그 이상으로) 시설이 화려한데,

앞에서 아가씨가 드나드는 사람에게마다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주고 있다.

이건 뭐 백화점이나 고급 요리점에서 하는 짓 아닌가?

병원이 이래도 되는가?

사람들은 지금까지 의사와 병원의 불친절을 겪어서

병원이 친절하고 요리점 이상으로 손님을 깎듯이 모시면 좋은것 아니냐고 하겟지만. 그건 아니다.

왜냐. 병원이 백화점이나 요릿집은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은 그것이 그대로 돈이다. 의사가, 병원이 일반 접객업소처럼, 혹은 접객업소 이상으로 친절하다는 것은, 다른 병원보다 유독 심하게 높은 수입을 목적으로 그렇게 운영하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

그것은 결국 같은 병을  가지고 더욱 많은 돈을 환자로부터 욹궈낸다는 뜻인데,

돈만 울궈내면 어떨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안해도 되는 치료를 많이 하면 제 몸이 더욱 망가진다는 점이 문제다..

친절 그 자체가 아니라, 접객업소가 아닌 병원에서

정도이상으로 친절한 것은 그 이상의 의도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한사람의 의사로서 본다면, 친절을 요구하는 환자에 대해서는

느낌이 좋지 않다.

의사에게는 친절하기를 요구하기보다는 잘 치료해 주기를 요구해야 한다.

잘 치료하는의사는 친절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자, 이제 청양궁으로 이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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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궁은 도교의 성지이다. 전체 중국에서도 도교 사원으로서 가장 중심되는 곳이다.

당대 666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





혼원전






도법자연 (도는 자연에 법한다. 도는 자연을 법으로 한다.)

쳥양궁에 있는 염소가 볼거리라고 한다

양이  염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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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삼국지의 본거지 무후사로 이동한다.

무후사는 물론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이다.

서진의 말기에 작은 사당으로 건립했다고 한다. 

(서진이 제갈량을 죽이고 통일했는데, 서진의 세력이 기울게 되어서야 겨우 작은 사당이라도 건립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이지방 사람을의 제갈량에 대한 숭모심은 높아갓고, 이 사당은 커져갔다.

그러다가 급기야 明대에 제갈량의 주군인 유비의 사당이 여기에 합해졌다.

신하의 사당에 훗날 군주의 사당이  추가된 것도 특이하다. 

유비의 사당은 이름이 昭烈司(소열사)이다.


사실 지금은 이렇게 쓰지만,  가느라고 고생 깨나 했다. 

덥고, 목마르고, 다리 아픈 것은 기본이지만, 

버스 로선을 잘 모르니까 몇 번을 갈아타고, 왕복을 하고 해서 겨우 찾아 갔는데,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버스가 메어 터지고,

버스가 서지도 않고 그냥 가고. . . . .


학생, 가족, 아줌마, 애들, 아가씨,. . . .

그럴 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중국인들이 정말 삼국지를 좋아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무후사


소열 묘


사람들. . . .


사람들. . . .


제갈량이다.


이건유비인데, 어둡기도 하고,사람도 많고 해서 제대로 못 찍었다.



세명이 도원결의 하는것도 묘로 만들었다.


장비.

중국어 속담에 아주 쉬운 일을 "장비 콩나물 먹기"라고 한다.

장비가 아니라도 나는 요즘 집 근처에  "전주 콩나물국밥집"이 생겨서 콩나물 먹는 것을 즐기고 있다.

원래 전주콩나물 국밥은 밥이 적은 것이 특색이다. 콩나물이 主가 된다.

그래도 밥이 적은 것은 좀 아쉽다.

다행히 그집은 셀프 리필이 가능하다.

밥을 큰거 한 숟갈  추가하면 양이 딱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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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소각사와 문수원.  청뚜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찰 두군데를 가 보았다. 

사진이 넘쳐서 차수 변경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