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내륙 16. (2015. 7. 30. 목) 중경 -홍암, 임정
중국내륙 16. (2015. 7. 30. 목) 중경 -홍암, 임정
충칭(重庆 중경)은 고대 인류가 거주한 고고학적 유물이 나온 곳인데, 여기서 살던 사람(?)들을 우산인(巫山人), 파인(巴人)등으로 이름붙였다. 중경은 사실 사천성(四川省)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18년전, 1997년에 직할시로 지정되었다.
중경이 인구가 많다고 하는데 (약 2000만명) 그걸로 보면 세계 제1이기는 하다. (멕시코 시티가 약 2000만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중경이 우리로 치면 광역시이지만., 실제로 지도로 보면 중경의 넓이는 우리나라 도(道)보다도 넓다. 즉, 중국은 도농복합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경기도만한 것이다. 우리나라 경기도와 서울을 합치면 2000만명이 넘는다.
그러니가 중경만 유독 인구가 많은 것은 아니다.
오후에는 홍암(홍옌촌 红岩村)으로 이동한다.
홍암은 가릉강(嘉陵江)가에 있는 작은 산(가락산,歌乐山)에 있다. .
아마도 버스를 타고 간 것 같은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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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重庆 중경)은 항일전쟁 시기에는 한때 국민당 정부(장개석)의 수도(1929년)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자리는 예전국민당의 국민당 군사조사 통계국과 중미합작소가 있었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의 공습을 많이 받은 장소이기도 하다.
동시에 홍암은 중일전쟁 당시 남부지역 중국 공산군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일본놈들하고 싸울 때, 주은래(周恩來) 등 중국공산당 간부들이 이곳에 거주했다. 그리고 일본놈들이 패망하자 1945년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이루어진 쌍십협정(雙十協定-10월 10일에 체결된 평화협정)도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그후, 공산당의 기관지인 <신화일보(新华日报)>가 여기서 발간되었고, 이 혁명기념관은 1958년에 건축되었다.
일본놈들이 물러간 이후에 다시 장개석군(국민당)과 모택동군(공산당) 사이의 갈등은 이어졌고, 다시 내전(內戰)의 위기가 왔다. 대학생들은 다시 반전집회를 열고, 다시 두 정파가 여기 홍암에서 45일간 마라톤회의를 열고 싸우지 않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그 1년후, 장개석은 공산당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이후 중국은 3년동안 치열한 내전을 치루었고 결국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났다. 물론, 여기 중경에서의 홍암촌 전투가 결정적이었다.
(당시의 수도가 중경이니까 서로 중경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훗날 중국(중공)은 이곳에서의 전투의 승리를 이름하여, 홍암정신(홍암혼)라고 하고 국민들 정신교육에서 강조하였다. 전시관에서 보면 홍암혼에 관한 책자, 전기도 많이 나와있다.
(장개석이 나쁜 놈이다. 그런데 내가 중국 쪽 자료만 보아서 그런가? 이건 공개된 대한민국 국내 자료인데. . . . ?)
홍암 혁명기념관
수많은 책자들과 자료들이 나와 있다.
죽은 사람들
또 죽은 사람들.
또 죽은 사람들.
소년 혁명 전사.
드디어 중경 해방 = 장개석 군의 패퇴
. . . .
많은 과정과 사진이 있으나, 이만 생략하고. . . .
나오는 길에 소학교가 있다.
소학교 = 초등학교 이름이 열사묘 소학이다.
아무리 그래도 소학교 이름에 "묘"자가 들어가는 건 좀 . . .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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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군 사건>
장개석이 (물론 국민당 정부가 저지른 부패와 죄악은 많지만) 국공합작 중, 크게 공산당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동지를 적으로 몰아 공산군을 다 죽여버린 신사군(新四軍) 사건이란 것이 있다. 이 사건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1941년 당시 공산군은 북쪽의 팔로군과 양자강 남쪽의 신사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그런데 공산군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장개석은 신사군을 안후이 성 및 저장 성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은 이에 동의하고 병력을 양자 강 이북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신사군의 정예 병력 9,000명은 3개 방면으로 나눠 양자강을 건너 집결했다. 이때 갑자기 8만명의 국민당 군이 나타나 이들에게 공격을 개시하였다. 숫적 열세에 밀려 신사군은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고 부대장 예팅은 부하를 살리기 위해 1월 13일 국민당군측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예팅이 협상하러 오자 갑자기 국민당측은 그를 체포해 버렸고 2,000명의 병사만 살아서 도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사실상 제2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은 항일전선을 깨뜨렸다는 비난에 당면한 반면 공산당은 항일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인해 양자강 남쪽의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인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내용은 위키피디아에도 나와있는 것이다.-편파적이 아니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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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임시정부를 찾아 간다.
임시정부 청사 찾기가 쉽지 않다.
자료에는 찾기가 쉽다고 나와 있는데, 그건 아니다.
찾기 어려운 것을 구태여 "찾기 쉽다"고 표현한 데서도
이기심을 느낀다. 더욱 과장해서 선전하고 싶다는거지,
내가너무 예민한건가? 그러나, 정말 귀퉁이에 푹 파묻혀서 안내판도, 가는길 안내도 없이
고생을 시켜놓고서도
구태여 "찾기 쉽다"고 강조한 심사는 뭐란 말인가.
시내 (옛날 동네에 있으니까) 칠성깡 근처에 있다.
이 깡(崗)이란 글짜는 괜히 재미있게 느껴지는데, 작은 초소 같은 것을 "깡"이라고 한다. 교통정리하는 초소, 헌병들이 검문하는 초소 같은것.
그런데, 괜히, 캔을 뜻하는 우리말 "깡통" 의 유래가 여기서 온 듯하게 자꾸 생각하고 싶어진다. 왜일까?
깡통이다? 통이다? 깡이 통은 맞는다. 그런데, 이런 깡은 아니다.
아마도, 캔을 일본 사람들이 깡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깡을 이 깡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유는 별로 없다.
가는 길에 통원문(通遠門)을 지나는데, 거기 조형물이 재미있다.
마치 고구려 병사들이 성벽을 오르는 것 같다.
연개소문이나, 대조영, 혹은 고려조까지 내려가면 강감찬 등의 전투장면 같다.
이 지역에 그런 역사적인 내력이 있을 터인데,
거기까지는 자세히 보지 못했다.
거리에 안내지도도 있으나, 임시정부는 나와있지 않다.
아파트 단지 안을 지나서
유치원 옆에 잘 보이지도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그런게 있는지 잘 몰랐다. 여러 사람이다.
어떤 나이 많은 할아버지한테 물어서야 겨우 찾았다.
임시정부 청사를 느낌이 무슨 형무소같다고 하면 안되겠지. . . . . .
문이 닫혀있다. 다섯시 전인데. . .
끝나기전에 온다고 빨리 온 것인데.
나는 문 닫히는 시간을 의식하고 늦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건 주최측 잘못이다.
밖에서 보는 수밖에 없다.
삐. . . ..네시반 까지라고 적혀있네. . .
순 자기들 맘 대로야. . . ..
나는 살그머니 문을 밀어보았다. 아, 열린다 열려. . . .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다.
담치기라도 해서 들어갈 생각도 햇다.
담을 타넘을 생각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이 열린다.
살살 밀어보니, 거기 바로 수위실이 있는데, 그리고 수위인지, 표받는 아찌인지,
사람이 있는데, 자고 있다.
솔직히, 나는 숨어들어갈 생가은 아니었고, 사정을 해 볼 생각이었다.
딱 십분만 보겠다고, 한국에서 여기가지 보러 것을, 그 심정을 이해 못하겠느냐고. . . . .
나는 정말 순전히 이걸 보러 여기까지 왔다고. . .
그런데 잔다? 잘 된 건가? 못된건가?
일부러 깨울 필요는 없겠지? 담치기까지 생각한 주제에?
그래서, 그냥 들어가서 다 보았다.
(급히 찍어서 그런지 사진이 다 흔들렸다. 아마도 어두워서 그랬겠지. . .)
사진 다 찍고 나오는데, 그 사람이 깨어있다.
흐미!!
엄청 니분 나쁜듯이 쳐다본다.
여러 얘기 할 것 없다.
빨리 나와 버리는 일 밖에는.
네시반 까지 입장이라고 써 놓은 건 너네가 잘 한거냐.
그게 왜 네시반이냐. 너네 행정편의주의 아니냐.
(나중에 흥사단에서 어떤 분께 그 얘기를 했더니, 자기는 그것 때문에 중경을 서너번 갔는데,
" 사람들이 너무 성의가 없다. 임정 청사가 너무 버려져서 방치되어 있다.
그사람이 중국사람이더냐?" "모르겠는데요?" "그것도 그렇다. 여기 광복회 사람들이 가서 지키자고 했는데, 가지도 않고, 그냥 중국 사람한테 맡겨 놓으니까 그모양이 되는 아니냐. . ." 뭐뭐 막 그러셨다.)
이제 저녁먹고 들어와서 땅콩에 맥주.
혼자서 먹는 거지,
여기 맥주는 싸다. 한병에 싼데는 2위안, 아니면 4위안.
물값도 아주 싸야 1-2위안, 어떤 데는 3위안도 하고.
물값이나 맥주 값이나 같다.
그래도 맥주를 물 처럼 마시면 안되지,.
내일은 중경을 떠나 따주(대족)로 간다.
버스를 타고.
따주는 석굴이 있는 곳이다.
이번 여행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이다.
기대 된다.
특히 따주 불상들은 다른 곳보다는 예술적인 정도가 더 높다고 한다.
(더 후대에 만들어 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