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국 사찰 석굴 기행 (43) 7/30 (수) -따통2

원 통 2015. 3. 21. 10:12

 

 

윈깡석굴을 나와서 이제 화엄사, 구룡벽, 선화사로 간다.

세가지 모두 시내에 있다.

 

따통의 화엄사도 무지 크다.

요나라 때에 창건되었다고 하니까, 북위  시절은 아니다.

남쪽에는 송나라가 있었는데, 요나라는 만주족에 의해서 창건되었다.

 기실, 이름이 요나라인 것이지, 사실은 북위 족의 후손이나 다름이 없다.

요나라가 망하고, 북쪽은 금나라가 차지하는데, 금나라는 확실히 여진족, 즉 만주족이다.

우리와 가장 가깝다고 하는 북방빈족은 금나라이다. 

나라이름도 경주 왕실과 같은 김씨이다. 

 

그러나, 지리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거의 같은 민족으로 보아도 된다.  

지리적인 차이라면 삼국지의 위나라와 오나라의 차이 정도 되지 않겠는가.

 

다만 한족들에게는 문자의 통일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발음은 달라도 이름의 통일은 있었던 반면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북방 민족들은 문자가 없었기에 고유의 서로다른 풍토어를 쓰고 있었을 뿐이다.

(물론, 이들 민족들을, 민족 구분 없이 모두 한통속으로보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 김운회 가 쓴 "대쥬신을 찾아서"라는 책에 근거한다.- 동의한다.)

 

다만 고려는  요나라, 금나라의 침공을 받아서 싸우기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고, 이민족이 되지만(관념상),  어차피 이웃 나라끼리 싸우기는 삼국지에서도 그랬고, 백제와 신라도 그랬다.  

 

각설하고,

암튼, 이 화엄사는 당시(고려초, 송나라 시절)  북조의 화엄종의 총본부였다.

화엄사, 구룡벽, 선화사  순서로 가 보았는데, 

마침 가이드북에 그 순서대로 잘 나와 있다.

 

 

 

이 상화엄사는 중국의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고도 하고,

다섯 분의 부처님은 중국의 국보라고도 설명되어 있다.,

또 박가교장전 (바가범 즉 부처님의 교장, 즉 불경을 안치해 놓은 곳, 즉 장경각인데,

閣이 아니라 展이다.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각과 전의 차이는, 각하와 전하의 차이로 보면 되겠다.

각하는 전하보다 한참 아래 부하이다.  

옛날에 박정희를 각하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반발심이 많았는데,

기실 각하란 그렇게 높은 계급은 아니다.

 

 

 

비교적 번화한 거리로 나와서. . .

(저 오른 편으로 들어가면 얼통공원, 즉 어린이공원이다.저녁때는 따통공원에 가서 놀았다)

 

 

곳곳에  성벽과 문루 공사를 하고있다.  대체적으로 장안성(Xi-an) 비슷하게 꾸미는데,

이런 모습은 카이평에서도 보았다.

제국의 황도였다는 표시렸다.

 

 

드디어 화엄사이다. 종루도 만만치 않다.

물론 이건 아마도 새로 꾸민 것일 것이다.

 

 

이 건물은 (매우 큰데)  아마도 짐작에 새로 건축한 게 안니가 싶다.

이건 내 생각인데, 화엄사가 있는데, 이걸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려고

대대적으로 공사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찰 앞의 시민광장과 함께.

 

아무튼 무지하게 크고 높다.雅趣도 있고.

그런데 역사적인 건물이면 설명이 나올텐데 그게 빈약하다.

현판에는 御酬洪澤이라고써 있다.

주변에 못이 잇는데 (금잉어도  있다)  황제께서 내려주신 넓은 못이란 뜻이렸다. 

연꽃도 있다.

그 속에 이런 건축물을 세운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쨎든 이 건축물은 화엄사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상징적인 건물이 되었다.   

 

 

 

 

 

지하에는 이런 불전도 다시 만들어서 모시고 있다.

 

 

속으로기어 올라가 보니. . .

 

 

사원경내와 따통 시가 다 내려다 보인다.

 

 

그런데, 이게 웬일 무수한 재개발. . . .

재개발. . . .

우리나라 재개발의 악몽이 떠오른다.

무수한 가난한 시민들의 원성을 사고, 고통을 주어온 도심 재개발. 판자촌 재개발.

재개발 때문에 얼마나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얼마나 애끓는 눈물을 맍이 흘렸던가.

며칠 전에도 왕십리 재개발 때문에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 그곳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소규모 공작소, 닥트, 댐통, 기계공작. . .)이 얼마나 뿌리뽑히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현재형)  얘기를 들었다.  

있는 사람들만 잘사는  그런 나라가 되면 안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과 행정이 되어서는 안된다. 

기층 민중들의 생계를 파탄시키고,

그러고 나서 이제와서 "경기가 안좋네, 경제가 큰일이네" 해 봐야 소용없다.

 . . .

. . .

다시 구경이나 하자.

아, 교회도 보인다.

산서성에서 교회가 자주 눈에 뜨이는 것은 아마도 성의 종교 정책이 좀 그래서인가?

 

 

이것이 박가교장이다.

사람하고 비교해 보면 큰 것을 알 수 잇다.

글짜 한 자가 사람 키만 하네. . . .

그 옆에 "고찰 중신"도 보인다. 옛 절을 새로 꾸몄다. . . .

그런데, 그 글씨를 쓴 것이 청나라 옹정제. . .사백년 전이다.

 

 

이 박가교장 현판은 청나라 강희제  시절에 쓰인 것이다.

강희제는 1661년부터 1722년까지 61년동안 재위했다. 최장수 황제이다.

앞의 옹정제의 아버님이시다. 그리고, 말년에 출가해서 중이 되고싶어했던

순치황제의 아드님이시다. 

순치제는 17년동안 제위에 있다가 천연두로 죽었다(중이 돼 보지도 못하고. . . ㅉㅉ,. . .).

 

당시 천연두가 죽음에 이르는 공포의 병이었는데,  그래서 황실에서는 (면역학 공부를 잘 해서)  왕자 중에서 이미 천연두에 한번 걸렸다가  나은 경력이 있는 8세의 왕자를 제위에 앉혔는데, 그가 강희제이다.

61년동안 황제가 되어서 청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든 것도 능력이지만, 그의 능력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천연두를 이겨냈다는 데서도 증명되는 것이다.  

 

 

 

그 속에 부처님이 계신데,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계시다.

중국절은 이렇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계신 부처님이  자주 눈에 뜨인다.

1. 오래되었다는 고색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2. 아니면 원형보존을 위해서인지,

3. 그것도 아니면 손이 미처 못가서인지  잘 모르겠다.

 

그 셋 다일지도 모르겟다.

암튼 우리 생각에는 좀 닦아 드렸으면 싶다.  

 

 

 

향로의 용이 멋 있어. . . . .

 

 

 

상화엄사  현판이다.

전반적으로 상화엄사가 화엄사보다는  비교적 초라하다.

그건 가이드 북과 다른데, 가이드북이 아마도 두 절을 바꾸어 썼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상화엄사는 비교적 크고 보존이 잘 되어 있으니까 그대로 두고,

화엄사 쪽이 도심재개발 사업에 의해서 한층 화려하고 거대하게 최근에 건축되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내막은 확실치 않다. 자료도 충분치 않고, 그것까지 따져볼만한 여유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한통속이니까  (이럴때 적합한 표현이다.)

크게 문제될 것은 없겠다.

 

 

 

여기 사천왕은 무지무지화게 박력이 있다. 그 표정이 너무도 생생하다.

마치 무협 영화에 나오는 力士로서, 금방 살아 나올 듯하다.

very powerful, very impressive !

이 정도면 미켈란젤로 못지않은 예술품도 되지 않을까.

미술에 전문적이지 않은 나로서는 이런 무책임한 말도 막 해본다.

그래도 나는 그정도 점수는 주고 싶다.

발 밑에 야차나 귀신들을 밟고있는 모습들은 또 어떠한가. . . .

 

 

 

한장 만으로는 아쉬워서 그 맞은 편에 있는  사천왕님도 올려본다.  

과연 대단하다.

발 밑에서 신음하는 미련한 중생은 또 어떠한가.

 

 

대웅보전에는 조어장부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있다.

안될 건 없다.

여래,응공, 정변지, 명행족,세간해, 조어장부. . . . 

 

 

 

정말 화려하다.이게 가이드 북에서 말한 노치보살 상인지도 모르겠다,.

설명은 없다.

 

이제 화엄사를 다 보고, 시민광장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여인들, , . . .

궁중 시녀의 모습이었을까?

낮에도  등불을 들고 지키고 있구나.

 

 

인근에 이슬람 사원이 있다.  이슬람 사원은 어디서나 절 이름이 청진사(淸眞寺)이다.

 

 

영태가를 지나

 

 

정양서국을 지나 

(오래된 전통있는 서국이었던 것 같다. 정원 안에 훌륭한 탑도 있다)

입장료도 있으니까 그냥 지나치기는 이것까지 들어가 보기에는 아까운데, 시간에 제약이 있다.

 

 

날씨도 덥고, 일단 뭘 좀 먹어야 하니까. . . .

항주 샤오롱빠오(소쿠리 만두)라? 여기 따통에 웬 항주?

암튼, 만두나 먹자 . . 했는데,

들어가 보니 메뉴에 마파두부가 있어서

 

 그렇다면 만두보다야 마파두부가 훨 낫지. . .꺼럼. . .

게다가 완톤(훈툰)까지. . .

 

 

 

이제 구룡벽하고, 선화사를 가보자. . .

쨘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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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벽은 뭐 뻔하다.

명나라 주원장의 아들이 있었대나 뭐래나. . .

very simple.

이동.

 

 

 

 

 

인근에 법화사가 있다.

도심 사찰인데, 조용하다. 신도들의 예배가 있다.

그러니까 관광 목적으로 지은 절이 아니라는 이야기.

즉 살아있는 절이다. 

 

 

 

종루도 특색이 있고 멋있고,

 

 

문도 멋있다.

 

 

조용하고 고즈녁하다. 아기자기한 정원. . . .

나는 이런 게 좋다.

누구나 그렇겠지.

 

.

 

 

상락아정이라. 열반경에 나오는 말이지.

무상이라고 하고, 苦라고 하고, 무아라고 하지만, 그건 중생살이가 그렇다는 얘기고,

보살의 삶을 살고, 진여의 삶을 살고, 부처의 삶을 살아서,

무상고무아 자꾸 생각하지 말고, 빨리 깨달아서

항상하고, 즐겁고, 我가 있는  적극적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여기는 법화사. 흔히  法華家에서는 열반경을 "이삭줍기"라고 한단다. 

무엇의 이삭인가? 법화경으로 진리를 다 추수하고 난 뒤에 흘린 가르침을 이삭줍기하는 것이 열반경이라는 뜻이다.  

물론, 열반경을 깎아내리기 보다는 그만큼 법화경이 중요하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법화경과 열반경은 같이 간다, 형제와도 같은 경이라는 뜻일 것이다. 

즉, 법화경의 내용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열반경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대웅보전

 

 

부처님. . .사람 안 보는데서 찰칵 !

 

법화사를 나와 걸어가다가 보니, 또 천주당이 보인다. 그런데 거기서 병원을 운영한다.

역시 산서성 기독교는 상당히 적극적이다.

골관절병도 보고, 구강의학센터도 있다.

 

아, 도심 재개발. . . . .

이 폐허.

뿌리 뽑힌 삶.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원망이 묻어있을까.

 

그 자리에 이런 건물들을 짓기 위해서. .

이제 한참을 걸어, 선화사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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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에는 선화고사라고 쓰여있다.

역시 국가중점문화단위이다.

 

 

 

 

경내가 넓찍하다

 

 

보현각

 

 

문수보살이라고 질소냐. 문수각.

 

 

 

 

 

 

국태민안, 만사형통

 

 

 

대웅전의설명을 보면,

이 대웅전은 요나라 시내의 유적이라고 한다. 물론 당시의 건물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하튼 따통은 북위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요나라의 중심지이기도 햇다. 중국 역사가 남방 한족 중심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렇게 북방민족, 선비족, 요나라 금나라의 역사는 푸대접을 받는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이다. 북방과 만주 민족으로서  제나라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이제 우리 한국 밖에는 안 남았다. 모두 중국으로 흡수된 것이다. 그리고 그 민족들의 역사는 사라진다.

티베트도 그렇게 되겠지.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가 그렇게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대웅전 속의 부처님도 5불인데, 흔히 5智如來라고한다.  

이것은 金代에 만들어졌다고 안내판에 쓰여있다. 그러니까, 金나라, (우리와 민족적으로 가장 가까운 금나라, 그러니까 여진족의 후예)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 고려 초 서희장군이 물리친 금나라 역사가 여기 나오는 구나.

(아골타 자신이 신라의 후예라는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흔히 여래를 5지로 보는 것은 특히 밀교에서 그러하다.  

밀교의 도래는 당나라 중기 9세기 경이니까,

11세기의 금나라에서 밀교가 상당한 지지를 받았을 법도 하다.

실제로 고려불교에서도 밀교의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아무리 금나라 부처님이라고 해도,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계시기는  예외가 없다.

이 산서성 부처님들은 이상하다.

화엄사 부처님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고. . . .

 

 

 

 

자, 이제 오늘 공부는 다 했다.

시간이 좀 남으니, 따통 공원을 또보러가자.

 

 

도심 곳곳에 공원이 있고, 이렇게 인공호수가 있다. 

좋은 일이다.  대개 공원이면 어김없이 물이 있다.

 

내가 중국놈들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중국보다 낫다고 하는 그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말이다.

돈이 많으면 나은 것인가? 돈 얼마나 더 많은데?

우리는 미국 놈들한테 그런 소리 하면서. . . .

 

 

아, 괜히 흥분했네.

시원한 데서. . . ..

 

 

어린이 놀이기구.

"송림비서(소나무 숲의 날다람쥐)"  라는 이름의,

 

 

이제 숙소 근처 시장으로 돌아와서,

국수와 만두를 먹고,

편안히 쉽니다.

콩국수, 칼국수 간판이 많이 보이네요.

 

다음날은 북경으로 이동하는데,

약 6시간 반 걸리는데, (터콰이, 특급열차로),

밤차 타기가 지겨워서,

아침 차를 끊었습니다.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갈 생각입니다.

 

들어가 자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