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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세계? 나의 세계?-마음이 세계를 만들어 낸다?

원 통 2008. 8. 20. 17:11

너의 世界, 나의 세계

 

 

 

얼마 전 친구들과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외계(外界)가 實在하느냐?

외계는 나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 아니냐,

그러니까,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아니냐.

흔히 경전에서도 “인간의 業이 뭉쳐서 세계가 된다”고 하지 않느냐.

 

唯心이라고 하고, 心外無物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마음 밖의 客觀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 아니냐.

 

저도 일체 유심조가 좋아서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고,

만일 “마음 밖에 객관 세계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많은 문제가 생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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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ㅡ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솔직히 말해서,

 

“이 세계를 내가 만들었다”, “내 마음이 만들었다”,

혹은 “내 마음이 없다면 이 세계도 일시에 없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좀 지나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부정할 수 없지요.

 

그렇게 본다면 객관세계도 없는 것이고,

과학의 근거도 취약할 수 밖에 없고,

특히, 내 業의 결과로 내가 지옥으로도 가고, 개나 소로도 태어나고 그런다는데,

이;렇게 태어나는 소나 개가 살아갈 곳도 없는 것 아닌가요?

 

 

“내 마음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면

사천왕이 계시는 사천왕천이나,

미륵보살이 살고 있다는 도솔천,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계셨다는 도솔천은 어디에 있는 건가요?

 

도솔천도 그저 내 마음에 있는 건가요?

그러면 내가 죽으면 그 도솔천도 그냥 없어지는 건가요?

 

기세간(器世間), 人間界가 내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地獄이란 것도 내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고,

그러면 내가 죽으면 지옥도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윤회가 빌붙을 근거도 없어지게 되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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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세기경, 유식 논사(唯識 論師)들 사이에서는

<기세계가 마음 밖에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인가>에 대해서 논쟁이 상당히 오랫동안 격렬히 붙었었다고 합니다.

 

(지금 책이 없어서 쪽수는 모르겠고, “하룻밤에 읽는 불교사”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소운스님이 쓰신 것인데, 결코 하룻밤에 읽고 말 책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보면, 지금 제 말씀도 그냥 황당한 주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그들의 결론은 “외계, 혹은 기세계, 山河大地가 마음 밖에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있기는 있다”는 쪽이 논쟁에서 이긴 걸로 되어 있답니다.

 

일단 훌륭하신 論師님들의 말씀이 옳다는 쪽으로 두고 정리해 보면요,

 

(이건 제가 논리나 논쟁을 회피하는 태도인 것 같지만, 비굴하지만, 어차피 제가 공부를 못해서 깨닫지 못했으니 이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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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계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옳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런 내용인 것 같습니다.

(즉, 오래된 철학적 주제인 존재론과 인식론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어쩌면 . . 어설프지만. . .“인식이 존재를 지배한다 ”. .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요. )

(어떤 무엇이 존재를 해도 인식되지 못하면 그 주체에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지의 세계로부터의 알 수 없는 힘”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말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옳게”라는 말도 큰 문제가 있는 표현입니다.

어떤 것이 옳은 거지요?

부처님만이 옳게 보시는 가요?

그렇다고 가정하더라도, 깨닫지 않고서야 그 “옳게”의 실체를 알거나 느낄 수는 없지요.

 

즉, 여기서 인식의 상대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지요.

흔히;. 1수4견(一水四見)이라고 하지요.

사람은 물을 물로 보는데, 물고기는 물의; 존재ㅔ를 인식하지 못하고, 아귀는 물을 불로 보고, 天人들이 볼 때는 물이 유리처럼 보인답니다.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고도 하고,

같은 음식이라도 배부르고 고플 때에 따라서 사뭇 다르게 보이고,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사랑하다가 미워하다가 그러고, 젊을 때 보아 다르고 나이들어 보아 다르고, 아플 때 보아 다르고, 죽을 때 보아 다르고. . .

뭐 이런 얘기는 우리 충분히 숙달되셨지요?

이런걸 일단 “인식의 상대성”이라고 꼬리표를 달고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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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인식하는 바에 따라서, 인식자의 마음가짐, 마음상태에 따라서 외계가 충분히 달라 보이는 것,>

이것을 좀 충격적으로 표현해서 일체유심조라고 한 것 아닌가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설명하면 외계라는 것을 “자기와 독립적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인간의 사고가 그런 외계에 (매우 불완전하고, 오류 투성이인,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또 죽어서 개가 되면 한없이 달라질 그 외계에 ) 집착해서,

 

독립성을 부여하고, 그것은 자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혹은 이렇게 저렇게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심각한 맹점(深刻한 盲點)을 가지고 있지요.

우리 인식기능에 있어서의 심각한 결함이랄까,

혹은 달리 표현해서, “인간을 중생 되게 하는 독소적 요소”라고나 할까.

그런데 빠져버린다 말이지요.

 

그래서 선사들의 말씀은 그것을 경계하거나, 그 함정에 빠지지 말도록 경책하는 표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相에 着하지 마라, 상에 住하지 마라, 외계는 幻影이다, 관념에 빠지지 마라,

몽환포영이다, 이슬이나 번갯불 같은 것이다. . .

이런 수많은 표현들이요.

(일체유심조는 원효스님에 의해 유명해 졌지만, 화엄경에서 많이 반복되는 표현이지요)

 

4大로 이루어진 육신(色)도 그렇지만, 우리들의 감각기능, 관념, 느낌 생각, 즉 受想行識도 그렇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설사 외계, 혹은 山河大地라는 것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치더라도,

자꾸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는 거 겠지요.

 

 

하여튼, 이렇게 본다면 세계는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겁니다.

세계는 사람의 수 만큼이나, 아니 중생의 수 만큼이나 많이 존재하는 겁니다.

아니, 한 중생에 있어서도 시시각각으로 인식하는 외계는 달라지는 것이니만큼,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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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보는 산하대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옥이나 아귀, 혹은 도솔천이나, 범중천, 광과천,

비상비비상처천은(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 우리가 죽어서 윤회를 하면서 가는 데인가요?

 

아니면,

구차제정(九次第定)으로, 색계, 무색계를 가는 것이니까, 참선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인가요?

누구는 죽어서 도솔천에 간다고 하고. . . .누구는 삼마타에 깊이 들어서 비상비비상처에 간다고 하고. . . .

 

그건 다음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