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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진리

원 통 2020. 2. 26. 15:23

절대적이어야 하는 가장 높은 절대적 진리(아뇩다라삼먁삼보리)

1.

종교마다 가장 이상적으로 삼는 가치(궁극적 진리) 가 각각 다르다. 교파마다도 다르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삼는 가치 또한 틀리는 것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 현상은 한사람의 종교인으로써 매우 난처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이상적인 가치란 그렇게 서로 다르면 안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누구는 A라고 하고, 누구는 B라고 하고, 누구는 C라고 한다면 누구 말이 맞는다는 말인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이 A라고 했다고 해서 A가 맞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저사람이 믿는 B라는 진리가 정답일 수도 있지 않는가. 이렇게 “절대적이고 가장 높고 확실하여야 할 진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를 난처하게 한다.

나는 여기서 상대방에 대한 인정이나 양보, 혹은 똘레랑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절대적이고 높은 확실한 진리는 서로 달라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리에 대해서 상대적 옳음을 용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그 절대적 진리하는 것이 물론, 기독교와 불교가 다르고, 기독교 내에서도 교파마다 다르고, 불교와 브라만교가 다르고, 불교와 자이나 교가 다르다. 그 달라서는 안되는 절대적 진리(아뇩보리)가 소승과 대승이 다르고, 안혜의 학설과 --의 학설이 다르다. 화두선과 위빠사나의 방법을 서로 틀렸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위빠사나의 경우, 미얀마의 10대 문파의 방법이 서로 다르다. 누구의 방법이 옳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것이 달라서는 안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 가장 높고 확실한 진리는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말은 다원주의지만 실은 일원주의이다. 다를 인정한다는 뜻에서 다원이지만, 그 다가 결국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일원이다. 그러나 그러한 다원주의도 일종의 요청일 뿐이요, 오히려 기독교에서 그 착한 사람들은 이단으로 취급받고 있다. 다른 종교의 가치도 우리 종교의 가치만큼 중요하고, 궁극적이로는 다르지 않다고 하는 착한 사상이 파문을 당하고 있다. 이쨎든 이렇게 “달라서는 안되는 것이 다르다” 는 현상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내 믿음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나의 생각이 그저 “신심 약한 사람”이라는 손쉬운 판가름으로 끝나도 되는 것인가?

3.

명백히 다른 믿음체계를 억지로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것이 옳으냐를 판정해 주는 최상의 심급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장 옳은 진리체계가 어느것일까를 고민하는 수밖에 없다. 동시에 웬만하면 서로 다른 진리체계도 용인하는 게 낫다. 그래야 내가 믿는 진리체계가 오류일 경우라도,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용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번 큰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데, 사실 다양한 진리체계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정말로 중요하고, 기본적인 부분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다양한 교리체계보다도, 서로 다르지 않은 부분이 진실로 중요한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는 상당히 보편적이며, 오히려 그것은 상식적인 것이고, 따로 특별히 종교랄 것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중시해야 할 것은 그런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느 종교라도 (올바른 종교라면) 남을 해쳐서 자기 이익을 도모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명에와 물질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재물을 허랑방탕하게 쓰기 위해서 돈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어느 종교라도 근검절약을 가르치고, 정직할 것을 가르치고 배우자에게 충실할 것을 가르친다. 어느 종교라도 생명을 존중하고, 인간을 위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어느 종교라도 인간의 천성은 착하거나, 착하지 않으면 착하게 되기를 노력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교리상의 차이는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승님들의 가르침 중에도 “교리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4.

불교는 (다른 종교도 그러하지만) 오랜 역사에 걸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추구를 충족시켜주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오리지날리티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도 된다. 2500년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을 지금 어찌 다 정확히 알겠는가. 그당시의 상수 제자도 잘 몰랐을 터인데, -나는 낯이 간지러워서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바로 그 호흡법, 바로 그 진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세계 3대 종교가 나름대로 2500년 동안 인류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면 그런대로 만족할만큼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웬만한 진리는, 웬만한 수행법은 3대종교 안에 다 개발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하며, 메시아를 팔아대는 종교는 참 넌센스이다)

좋은 얘기는 경전 상에 많이 들어 있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그저 좋은 말을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에 좋은 말씀이 너무도 많다. 그걸 실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교리는 부족한게 없다. 이대로가 완성이고, 이대로가 극락이고, 이대로가 부처이다. 이상한 틈새교리들을 더 개발해서 어디에 쓸 것인가.

5.

그러면, 먼저의 질문으로 되돌아 가서,

서로 다른 진리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

답을 하자면, 그건 그저 자기 취향대로 고르면 되는 것이다. 성현들의 가르침이 다 좋은 말씀이니까. 설사 좀 다르다고 해도, 나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니까. 어치피 모르는 내용, 끝까지 모를 내용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뜻도 된다. 교리는 그저 자기 취향대로 하면 된다. 동시에 자기와 다른 교리를 가진 사람도 존중해 주여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종교적 진리가 절대적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잡아 쓰는게 법(法)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러 가지 교리, 여러 가지 진리체계, 여러 가지 수행법 중에서 자기에게 맞는 것,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취해서 쓰면 된다는 것이다. 어차피 진수성찬을 다 먹을 수는 없다. 제 입맛에 맞는 것을 먹으면 된다. 팔만대장경은 진수성찬이다. 그러나, 성현들이 말씀하신 기본적인 가치는 꼭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상한 교리 싸움을 가지고 신비적인 설명을 해서는 안된다. 진리는 명백해야 하는 것이다. 명백할 수 없는 것 (죽은 다음, 세계의 끝 따위. . .)은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데 명백한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죽은 뒤에 무엇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느라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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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불교의 교리는 다양하고, 서로 다르고, 상충 모순되며, 서로다른 것들이 많다. 그렇다면 그러한 교리를 믿고 수행하는 목표인 깨달음은 잘 얻어질 수 있는가? 깨달음의 종류가 여러가지이고, 그 방법도 서로 다르다면 그 "깨달음"이란 것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즉 이렇게 교리가 서로 상충된다면(오류라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면) 그 깨달음이란 것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는 그런 깨달음이란 것은 없거나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불교의 목표가 깨달음인가? 불교의 수행목적이 깨달음인가?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오래 전에 인도의 크리슈나무르티가 "깨달음이란 없다"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 진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불자들은 깨달음이라는 병에서 깨어나야 할 것 같다.

깨달음을 수행의 목표로 삼은 것이 선불교의 가장 큰 병폐이고 독소이다.

이미지: 하늘, 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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