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2
1.
나는 니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라투스트라인가 뭔가 하는 그 책이 워낙 유명하다고 해서 시도해 보았지만. 그저 괴발개발 떠드는 잡소리였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위에서 그런 글, 그런 이야기들을 너무 일상적으로 접한다. “나”라도 그런 얘기는 얼마든지 한다. 그게 뭐 어쨎다는 말인가? 그런 얘기가 길기도 하다.
신이 죽었다는 게 충격이라고 하는데, 애시당초 우리에게는 그런 신(神)은 없었다. 신이 없었다는 우리에게 그게 무슨 충격이란 말인가. 내게 이상한 것은 그런 니체가 어찌 이리도 오랫동안, (그가 죽은지 118년이 된다. 1900년에 56살-나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까) 관심의 대상이 되는가이다. 니체가 아니라도 건강하게, 훌륭하게 멋지게 살다가 간 사람도 많은데, 평생 두통과 편집증,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간 사람 글을 우리가 그토록 중시할 필요가 있는가. 그런데, 그 “니체 읽기” 책을 보니 “우연과 필연”이야기가 나온다. 이건 또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것도 니체 의 중심사상이란다. 그걸 가치전환이라고 한 대나 뭐래나. . . .헐.
2.
나는 불교의 무아(無我)나 공(空) 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 다양한 노력과 참여를 요구하는 상활에서 그것은 너무 현실을 부정하고 떠나게 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촉발된 것이 유식(唯識)사상이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선, 공(空)이야기를 보면, 왜 공인가? 무자성(無自性)이 공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고유의 자성이 없다는 것-그것은 ①가합(假合)이라는 것과 ② 모두, 계속 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윤회는 부정이 된다. 내가 없는데 무슨 윤회인가. 무아윤회라고 하는데, 그건 결국 윤회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가합이란 계속 이합집산되고, 때가되면 흩어진다는 것이고, 변한다는 것도 때가되면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걸 연기라고 한다. 연기의 원리는 인과율, 인연법에 따른다.
문제는 여기서 공(空)으로 넘어가는 데 있다. “그러니까, 공이다.”
3.
초기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전화(轉化)가 이루어졌다.
왜 연기가 공인가? 큰눈으로 보면 그렇다는 거다. 길게보면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까, ㅋ믄눈으로 보느냐, 작은눈으로 보느냐가 이야기되어야 하는데, 공, 무아론자들은 큰눈, 길게만 이야기하지 작은눈, 짧게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중생이 그렇다는 건데, 우리네 현상게 살아가는 일상은 늘, 작은눈, 짧게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대승은, “큰눈, 길게” 만 이야기한다.
이것이 교리로 보면 이른바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이다.
파도가 늘 치지만, 큰눈으로 보면 물일 뿐이다.
얼음과 물과 구름, 비, 안개는 다 다르지만, 크게보면 모두 H2O이다.
인생이란게 별별 이야기가 다 있지만, 큰눈으로 보면 삶과 죽음이고 무상이다.
一切가 개고(皆苦)지만, 큰눈으로 보면 제행이 무상이다.
이렇게 큰눈은 차이를 무화(無化)시킨다. 같다는 거다.
변화하지만 결국은 변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다.
그래서 변화는 유위법이고, 변화없음은 무위법이다.
변화는 현상이고 변화없음이 본질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무심코 본질을 더 숭상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현상은 속제이고, 본질이 진제이다.
현상 | 본질 |
변화 | 일정함 |
多 | 一 |
작은 눈, 미시적 | 큰눈, 거시적 |
단기적 | 장기적 |
속제 | 진제 |
언설제 | 제일의제 |
분별지 | 무분별지 |
생멸문 | 진여문 |
. | . |
. | . |
연기법 | 공 |
여기에서 현상과 본질은, 진제와 속제는 동일한 대상(것)에 있어서의 서로 반대되는 두 속성이다, 하나의 존재에 있어서의 두가지 반대되는 두 측면이다. 원효는 그것을 일심(一心)이라고 했다.
이제 논의하는 것은 맨 아랫부분이다. 연기니까 공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연기는 변화하는 측면, 유위법의 측면을 말한 것이고, 공은 분별이 없는 측면, 무위법, 변화하지 않ㅈ는 측면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세상이, 모든 일이 변화인가 아닌가?
상(常)인가 비상(非常)인가?
무위(無爲)인가 유위(有爲)인가?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 모든 일에는 이 두 측면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만 강조해서도 안되고, 공만 강조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4.
세상 만사가 철저히 인연법 아닌게 없다고는 하지만,
어찌보면 내가 일본에 태어났을 수도 있고, 미국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
하루 전에 태어났을 수도 있고, 625때 태어나서 그냥 죽었을 수도 있다.
나는 중3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을 뻔 했는데, 그대 까딱하면 죽었을 수도 있다.
죽지 않고 살았는데, 이게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건 말하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다.
학교때는 우연히 좋은 선생을 잘 만나서 화엄학 공부를 잘 했다. 우연히? 내가 해주스님이 실력이 더 좋은지 어떤지 어찌 알았겠나.
우리때는 중학입시때 1점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동점자도 너무 많았다.
내가 용산중학교 붙을 수도 있었고, 중동중학교 안갈 수도 있었다.
그때 무우즙 사건만 안 났어도, 아버지가 그때 소송만 했어도 나는 용산중학교에 합격될 수 있었다. 그리되면 내가 육동신, 임종철을 못 만날수도 있었고, 그리되면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여자와의 관계라면 더 일러 무엇하리. . . .
이게 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필연이라고 하겠지. 그러나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우연일 수도 있다. 즉, 우연과 필연은, 종교가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과학이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철학이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는 거다.
이를 일러 아마도 “경향성”이라고 하는 것 같다.
5.
현실에 아등바등 집착하지 말자는 처세술을 다룬 책 중에 “내인생 모든 것은 우연이 결정하였다”는 내용의 책이 있다고 한다. 좋은 책이다. 인생의중요한 것이 이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현실의 불행이나 불운도 누구 탓이 아니고, 그저 어쩌다가 그리 됐을 뿐이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다. 누가 나빠서 그리 된 것도 아니다. 그저 하늘이 주는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일 뿐이다. 멋있지 않은가? 착한 일을 했는데도 왜 고통을 받는가. 그저 하늘의 뜻일 뿐이다. 내가 알 것 없고, 내가 알 수 없다. 내일 어떻게 될 것인가? 우연에 맏기자. 그리고 기쁘게 감사히 받아드리자.
어찌 보면 이것이 부처님의 무아사상, 공사상 아닐까? 필연의 철학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면 우연의 철학도 그 못지 않은 불교의 가르침 아닐까?
이 둘을 가르는 결정적인 경계는 인간사 이면의 중중무진의 인연을 인간이 알 수 있는가에 있다. 인간이 알 수 없다. 알아야 하는가? 아니다. 그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다. 받아드릴 때, 필연으로 받는가, 우연으로 받는가? 내 좋을 대로 받으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모르는 일을 꼭 필연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연기는 현상이고 공이 본질이다. 그렇게 본다면 필연이 현상이고 우연이 본질이다. 즉, 무상, 공, 무아의 불교의 대의에서본다면 필연 보다느 차라리 우연 쪽을 강조하느 것이 낫다. 어찌보면 우연이 필연이고 필연이 우연이다.
그런데, 필연은 우리가 모르는 저쪽에 있다. 우리가 모르는 저쪽을 '형이상학'이라고도 하고, 신이라고 도 한다. 물자체라고도 한다. 인식과 사변과 인지를 넘어서는 쪽이다. 그 필연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는 우연이다.
우리가 모를 때는 우연인 그것을, 구태여 아는체 하고 “필연”이라고 채색할 필요가 있을까?
사이비 도사들이 많은데, 자기도 모르면서, “음, 다 인연법이지요“하고 깨달은 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연 내세우는 사람들, 좋아보이지 않는다. 모르면서 아는 체 하기 때문이다.
6. <부기>
처음에 니체 얘기를 했는데, 니체의 표현으로는 이렇다.
“가치전환이란 우연의 필연성을 뜻한다.
디오니소스는 도박하는 자이다.
진정한 도박사는 우연을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는 우연의 단편들을 긍정하고, 우연의 요소들을 긍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으로부터 주사위를 던져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수가 나타난다.”
“모든 사물 위에 우연이라는 하늘,
천진난만이라는 하늘,
의외라는 하늘,
자유분방이라는 하늘이 펼쳐져 있다. . .
의외,
이것을 나는 모든 사물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물을 목적이라는 것의 예속상태에서
구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