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깨달음이라는 환상
한국불교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그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최고의 가치가 깨달음에 있다”고 하는 착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깨달음이라는 환상”이라고 표현한다.
그 주장의 내용을 알아보자.
(이 글은 지난해부터 벌어진 현응스님의 글에 대한 전통불교의 반발- 수불스님으로 대표되는-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그 분들의 글이나 말은 전혀 보지 않았다. 십년전에 현응스님 책만 대충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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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성제
불교의 가장 큰 가치는 이고득락이다. 현실의 고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것이 고사성제이다. 고집멸도라는 사성제. 부처님은 당신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라는 큰 테두리안데 다 포함된다고 하셨다. 마치 모든 짐승의 발자국이 코끼리의 발자국 속에 다 들어가는 것처럼,
인생을 고(苦)로 몰아가 것은, 고로 결박하는 것은 탐진치이다. 즉 탐진치를 극복하여 해탈을하여 영원한 즐거움을 얻는 것이 불교 최고의 목표이다.
사성제 중 탐진치는 집성제이다. 그것은 고의 원인이다. 그것은 81사(使)라고도 표현되었고, 10결(結), 5하분결, 5상분결로 표현되었고(결작이라는 뜻), 유식(唯識)학에서는 “탐진치만의견”의 6가지로도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마디로 번뇌라고 한다. (선불교에서는 번뇌라는 큰 기둥을 망상(妄想)이라는 곁가지의 뜻으로 추락시켰지만, 번뇌는 망상이란 뜻이 아니다. - 그것만 보아도 선불교가 얼마나 불교를 왜곡 추락시켰는지를 알 수 있다)
번뇌(탐진치의 3독이라고 간략히 일컬어지는)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고성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조복하는 것이 해탈이고, 열반이고, 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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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성제(번뇌-탐진치)
탐진치라고 하지만. 그 가장 근본은 갈애(tanha)이다. 초기경전에는 “갈애의 극복”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히 나와 있다. 갈애는 욕애, 유애, 무유애로 나뉘어 진다. 초기의 번뇌 표현은 거의 이 갈애가 전부일정도이다. (나중에 그 번뇌론이 더 세분되었지만).
하여튼, 탐진치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자.
① 탐은 욕탐이라고 표현되는데, 물질적 탐욕 뿐만 아니라, 그것은 수면욕, 식욕, 성욕 들을 뜻하고, 그 근본은 갈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탐”이라고 번역된 것은 좀 문제가 있다. 갈애를 물질적 탐욕으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불자들이 -나는 물질적 욕심이 없어-라는 생각으로 갈애를 극복했다고 착각한다.
② 진(瞋)은 성내고 미워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성난 망아지 같아서 제멋대로 이리뛰고 저리 뛴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고, 없는 것을 있다고 보고,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보고, 원수가 아닌 것을 원수로 본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려면 마음의 고삐를 쥐어야 한다.
③ 치(痴)는 어리석음이다. 진리를 바로보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가 진리이다. 무상 고 무아를 깨우치는 것이 우치(愚癡)를 극복하는 것이다.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삼법인)가 무상 고 무아이고, 그것은 결국, 무아(無我)사상으로 귀결된다. 그것의 본질은 역시 연기법이고, 용수는 공(空) 사상으로 더욱 그 내용을 확충하였다. 그리고 그것에 근거하여 유식사상이나 상생(相生)상의(相依), 법계(法界) 사상 등의 사상도 등장하였다. 즉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은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 모든 교학, 모든 경전은 이 사상을 다루고 있다.
3. 깨달음?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아사상을 깨닫는다는 것이고, 공사상과 연기법을 개닫는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반야지혜를 닦는다든가, 선정 참선을 닦는다든가, 교학을 한다든가, 육바라밀을 한다든가, 여러 가지가 있겠다.
“그래, 그게 불교의 수행이지, 그렇게 깨달아서 부처가 되면 윤회를 벗어나고, 해탈, 열반을 얻는거지. 뭐가 문제인가?” 여기까지 나는 당연한 불교의 뼈대를 정리하였다. 여기까지 별로 틀린 점이 없지요?
4. 다시 탐진치로 되돌아 가서,
열반의 정의가 “탐진치의 불길을 불어서 끈다”이다. 그것이 곧 성불이고 불교의 목표이다.
그런데, 탐진치의 불길이 깨달음 만으로 꺼 지는가?
“깨달으면 차차, 혹은 자연히 꺼지게 된다?” 언제? 막연히 그렇게만 얘기하면 안된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 그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깨닫는다고 해서 저절로 쉽게 탐진치의 불길이 꺼지는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깨달아서 쉽게 꺼진다면 탐진치의 세 마리 독사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치로써 깨닫는다고 해도, 마음의 불길은, 마음의 갈애심은, 마음의 탐욕심은, 마음의 싫어하는 마음은, 마음의 증오심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갈애), 진(싫어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이라는 독사를 두 마리 더 설정한 것이다. 우치(어리석음)라는 독사 한 마리가 아닌 것이다.
즉,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은 우치라는 한 마리 독사만 잡을 뿐, 나머지 두마리 독사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깨달으면 자연히 (혹은 쉽게) 탐진은 사라진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구태여 세 마리 독사라고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다른 두마리가 중요하니까 세 마리라고 따로 말씀하신 것이다. 깨닫더라도 마음 맡바닥에 있는 갈애심, 애욕, 소유욕, 자기집착, 자기애(自己愛) 이런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확장시키기 말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까지 깨달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중이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깨달음이라고 말하여 주제를 회피해 가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바로, 마음을 조복받지 못하고, 참선해서 깨달았다고 하면서, 혹은 불교 교리를 잘 이해했다 (공(空)도리를 알았다, 연기법을 알았다)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하지 말아달라는 말씀이다.
왜냐. 두 마리의 독사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도 이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우치를 극복하여 해탈한 것을 혜(慧)해탈이라고 하고, 갈애와 증애심을 극복한 것을 심(心)해탈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생각 머리의 해탈과, 마음 본능의 해탈이다.
그 이후의 교학에서도 이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장(障)-우리를 해탈로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우리를 결박하는 장애(障碍)에는 크게 보아 두가지가 있다고 햇으니, 그것이 소지장과 번뇌장이다(원효 스님의 주저인 “이장의”도 이것에 관한 것이다). 즉, 머리의 장애와 가슴의 장애이다.
소지장, 안다는 것의 장애, 그것이 불교의 진리를 무아사상을 잘 모르는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깨닫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깨닫는다는 말에는 그것까지 포함한다”고 하실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쓰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 때문에 수없이 많은 잘못이 생겨나는 것이다. 깨닫기만 하면 된다는. . . .
5. 그러면 어찌해야 탐진치가 조복되는가
일단 육바라밀이나 8정도를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잘 아는 말 아닌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말인데? 그렇지 않다. 불교가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고 해서, 마치 께닫는 것만이 중요한 것으로 되어 버린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즉, 바라밀 중에서도 <보시, 인욕, 지계>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선정, 지혜”만이 중요하다는 오늘날의 풍토가 잘못이라는 것이고, 그 근저에는 “불교가 깨닫는 중교”라고 잘못 알려진 데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만든 데는 선종(禪宗)의 과오가 가장 크다.
8정도 중에서 선정만 중요하다면 어째서 성스러운 도가 8가지나 된다고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겠는가. 깨달음이 나쁜 것은 아니로되, <불교가 깨닫는 종교다>라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으면 다 된다는 (선종이 심어놓은 가장 나쁜 독소) 생각은 오류이다. 그 생각이 오늘날 불교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가치가, 목적이 “그런 깨달음”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말이다.
6. 참선할 자격
사람들은 깨닫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참선을 열심히 하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나 참선 하는 게 아니다. 참선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6바라밀의 얖의 네가지를 잘 수행한 사람뿐이다. 네가지가 뭐냐? 보시,인욕, 지계. 정진이다. 보시 잘 했나? 인욕 잘 했나? 지계 잘 했나? 참선 할 자격도 없는 자들이 “깨닫는답시고” 앉아서 깨닫기만 하면 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말은 깨달음이로되, 깨달음이란 그런게 아니다.
모든 보시를 다 잘해야 깨달음이고, 지계 잘 해야 깨달을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사회, 이웃 생각 안하고, 정치 경제에도 관심 없고, 사회의 도덕성에도 관심 없고, 이 사회의 교육문제 가정문제에도 관심 없이, 그저 참선만 한다고 깨달음이 이루어 지는가? 그런게 까달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생각한는 깨달음, 그런 이기적인 깨달음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7. 부처가 되고 나서는?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한다. 성불한다고도 한다. 열반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지극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깨달은 후의 즐거움 . . 얼마나 선종에서 극찬하는가? 할일을 다 마쳤다고도 한다. 한(閑)도인이라고도 한다. 도인이 한가한가? 도인이 한가해도 되는가?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매일 놀고, 옥황상제처럼 하늘에서 선녀들과 춤추고 노셨나? 아니면 열반락에 취해서, 혹은 계속 선정의 즐거움 속에서 노셨나? 아니지?
깨닫고 나서는 뭘 해야 해? 당연히 보살행을 해야지? 보살행이 한가한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45년동안을 온 인도 대륙을 헤잡고 다니시면서 고생하셨나? 그래서 코삼비에서 제자들이 말 안듣고 속썩일 때 괴로워하시고, 제바달다의 모함과 종단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셨나?
그래서 부처님은 유리왕이 석가족을 멸망시키려고 군사를 몰고 오셨을 때 세 번이나 유리왕께 간청을 했나?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일족이 멸망하고, 석가족의 왕이 된 사촌동생 “마하나마”가 물속에 빠져 일족을 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바위덩어리를 몸에 묶고 물에 빠지는 것을 목도하셨나?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을 도와 불교를 마가다 국의 국교로 발전시킨 빔비사라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그아들 위두다바를 달래서ㅏ 조복시키기 위해서 그리도 애쓰셨나?
그것이 깨달은 후 도인의 한가한 모습이던가. 그래서 당신께서는 세수 80에 지친 몸을 이끌고 고요히 열반하고자 해도 수많은 제자들의 만류를 당하셔야 했나?
부처님은 깨닫고 나셔도 여전히 바쁘셨다. 쉴 사이가 없으셨다. 뭐? 깨닫고 나면 할 일을 마쳐? 할 일 이 없어? 그게 바로 선불교의 독소이다. 깨달은 후의 보살행, 이타행에 관심이 없고, 그저 깨달으면 한도인이 된다는 깨달음, 그런 깨달음은 매우 이기적이 깨달음이고, 매우 암적(癌的)인 깨달음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은 그런 깨달음이 아니다.
그렇기에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깨달음은 없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깨달음은 환상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8. 올바른 깨달음?
그럼 어떤 깨달음이 올바른 깨달음인가?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일단 쓰면 바로 “잘못된 깨달음”의 견해로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교는 온통 깨달음이라는 말로 채색되어 있다.
그래서 그럼에도 나는 그것이 환상이라는 주장을 계속 하고자 한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9 다시 정리하자.
① 불교의 목적은 해탈, 성불이고, 인생고를 제거하는 것이다.
② 그것을 위해서는 탐진치 삼독을 조복받아야 한다. 즉 번뇌를 조복받아야 한다. 그것은 혜해탈과, 심해탈을 의미하고, 번뇌장과 소지장을 없애는 것이다.
③ 그리고, 깨닫는 과정보다도 깨닫고 나서의 보살행, 이타행이 더욱 중요하다.
깨닫는 과정의 중요도가 45% 라면 깨달은 후에 해야 할 일이 55% 이다.
④그런데 탐진치의 조복 중에서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것은 우치의 극복이다. 깨달음만으로는 욕애 (갈애), 증오심, 증애(憎愛)심 등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것은 번뇌장의 극복으로서 가능하다. 그래서 수행(전체의 45%) 의 과정 중에서 깨달음이란 것은 그 1/3이다. 즉 15%이다.
⑤ 역시 6바라밀로 설명하자면, 앞의 네가지 보시 인욕, 지계 정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깨달음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전체 수행 중에서 깨달음이 갖는 중요도는 1/3, 즉 45% 의1/3인 15%이다.
⑥ 보리도 차제론으로 설명해 보자. 수행에는 3단계가 있다.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 이다. 그것은 마치 3층 건물을 짓는 것과도 같다. 1층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이고, 2층이 선정이고, 3층이 반야지혜이다.
그래서, (지금 깨달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정을 열심히 해야 깨닫는다고 하는데-그러나 선정 수행을 열심히 한다는 것과 반야지혜를 얻는 다는 것과는 또 다르다)
선정수행 (당신들이 말하는 깨달음 수행)은 3층 누각의 2층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1/3이다. 더구나 그것은 1층이 없으면, (보시, 지계가 없으면) 지어지지 않는 절름발이 2층이다.
불가능한 2층이다. 그런데도 계속 “깨달음”만 주장할텐가 ?!
그래도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으면, 부끄러운 줄 알면, “깨달음” 이전에 보시와 지계를 주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2016. 3. 22
사족: 그럼 불교가 왜 불교인가? 그이름이?
내 생각에 그것은 당시 인도의 수행 풍토에서 유독 “출가 수행에 따른 깨달음”이 강조되던 시대였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래서 대승의 초기 성자들을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보살사상이고 이타사상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발전되어 온 불교를 모르고, 깨달음만을 강조하고, 그것이 불교의 전부인양 잘 못 가르치는 이기적인 “깨달음 환상”은 바로 폐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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