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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내륙 45 (2015. 8. 19. 수)-소주(蘇州) 이틀째.-보국사.

원 통 2016. 3. 27. 18:25

중국내륙 45 (2015. 8. 19. )-소주(蘇州) 이틀째.-보국사.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서 (보국사는 시내에 있다. 선학원이 안국동 시내에 있는 것처럼)  보국사를 찾아 가는데, 찾아가보니, 바로 숙소 있는 동네이다. 숙소 유스호스텔에거 가장 가까운 절이 보국사였다.

그런데 절이 하도 작아서 거의 놓칠 뻔했다. 골목 입구에 조그맣게 보국사라고 페인트로 칠해 놓은 것을 보지 못했으면 그것도 한참 헤매고 (결국은 못찾을)  뻔했다.

다른 어느곳에서도 자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혁명의 산실 (만해스님의 우거나, 삼일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이 찾기 어렵듯이

태허, 인광스님이 잠자던 중국 불교를  일깨운 산실은 여전히 찾기 힘들게 자그마했다. 

(그것은 한동안 안국동 禪學院도 그랬다. 지금은 큰 건물을 지었지만, 그리고 지금은 개인의 탐욕에 의해서 종단 내의 利權다툼의 제물이 되고 있지만. . . )  

하여튼, 놓칠뻔한 보국사 뼁끼칠을 보고  버스에서 황급히 내려 찾아갔다. 



노란 벽에 까만 글씨를 찾아 보세요.

http://blog.daum.net/wonthong1/15411820



대웅전.  어디 시골 암자 같다.




옥불을 모셔 놓았다.

현재 중국의  절들은 크게 지어 놓았으나  대개는 관광적  가치와 관광적  목적을 갖는 것이다.

크고 화려한 절일 수록 절이 지은 것이 아니라.  省이나 市가 돈벌이 목적으로 지은 것이다.  

관광객들은 (아직까지는)  太虛스님이나 印光스님에는 관심이 없다는 거다.



홍화사 간판이 초라하게 걸려 있다.

개화기 출판 홍보 문서간행이라는 큰 역할을 하던 곳이다.

(마치 안국동 역에서 내려 걷다보면, 북촌 허름한 한옥 단칸방에 "만해 스님께서 삼일독립선언서 공약삼장을 쓰시던 곳"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걸려 있듯이)


여기에는 "소주불교박물관"이라는 것이  만들어져 있었다.

역시 불교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다

소주 시내 역대 사원 분포도이다.

송대 명대 청대가 구분되어 있다.

지도의 아래 왼쪽이, 즉 서남방이  영암사 쪽 (木瀆 쪽)이다. 그 쪽이 太湖 방향이다.

이 보국사는 소주 시내 중앙에서 더 윗쪽이다.  

남송 소정 2년에 그린 것에 의하면, 당시 고성 구에 사원이 50여개, 보탑이 13개.

그 중 비교적 규모가 큰 것이 보은사, 능인사, 정혜사, 만암원, 개원사, 서광사 등.

그러니까, 정혜사도  (지금은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조계사나 법련사처럼 - 집들로 들어 찼지만 )  그때의

寺域은 넓었다는 뜻.

명대에 남선사, 한산사, 쌍탑사 등이 추가 된다. 

청말에는 사원이 80여곳.

해방 전후에 그 사원들은 거의 양호히 보존되었고, 그 수도 증가하였다.  




開元寺가 상당히 크고 유명하고 전통 있는 절인데, 날짜가 부족하여 가보지 못 하였다.

아쉽다. 


정혜사에 대한 설명이다. 전날 문이 닫혀서 못 들어갔다.

여기서 멀지 않다. 이제 가볼 예정.


인광스님,



장태염(쟝타이옌- 장병린)  불교 사상으로 중국 정신혁명을 이루고자 했다.

장태염에 관한 글을 김영진선생 (작년에 경주 동국대 불교학과 전임으로 가겼다) 을 통해서 읽었었다.

기실 내가 중국 근대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김영진 선생 덕분이다.

실제 장태염의 모습이 궁금했는데, 여기서 보게 되었다.

환희심이 났다.


章太炎(1868-1936)의 고향은 여항인데, 항주의 바로 북쪽이다. 그곳은 명대 陽明學을 세운 왕양명의 고향이기도 하다. 장태염의 별명은 國學大師인데 즉, 經學, 전통적 학문의 대종이란 뜻이다. 그것은 그가 말년에 오랫동안 소주에서 國學講習所를 통해서 전통적 정신을 가지고 중국 정신을 다시 일으키려 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담사동(무술정변의 주역)의  혁명정신을 흠모해서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를 통해서 불교를 배웠다. 청조를 비난하는 글을 蘇報에 실었다가(1903) 3년동안 옥살이를 하는데,  옥살이를 하는 동안 주로 유식에 미쳐서 유식공부를 했다고 한다. (유가사지론과, 섭대승론 등이다) 

출소 후에는 民報라는 "동맹회" 기관지를 발행했는데, 그 사무실에서 노신과 주작인(노신의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장태염은 소주에서 죽었지만, 그의 기념관은 항주 서호 남쪽에 있다고 한다.







 전쟁 당시의 구휼 활동이다. 소주 전역의 사찰들이 활동했다.

이것은 영암산사에서 실시한 것인데, 무두 지역에서의 광경이다.



자, 이제 마지막 코스인 정혜사와 쌍탑사로 이동한다.

고고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