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수생각

광수생각 4 신비주의

원 통 2016. 3. 1. 20:11

 

 

지난번(3)에서는 불교에는 여러 가지 교리상의 충돌이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교는 2500년을 이어져 내려왔고, 2(중국인구 제외)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교리가 아니지 않는가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교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유로 말하면 교리상의 논란이 있더라도 그것을 받치고 있는 바탕 (종교성이랄까)이 있다는 것인데, 집으로 치면 바닥과 주춧돌과 기둥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

교리는 그 위에 지어진 지붕 같은 것이다.

지붕이 무슨 색이든, 지붕에 무슨 장식이 있건 집은 성립된다.

그러나 지붕에 따라서 집이 달라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내 말은 지붕이 잘 되어 있어야 하는데, 불교의 교리는 지나치게 혼란스럽다는 말이다.

불교에는 교리가, A, B, C형이 있고, . . .그렇다면 도데체 불교의 진리가 A란 말인가 B란 말인가 C란 말인가. 이런게 불교에는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책임져야 할 스님들이나 학자들은) 그것을 방치하고, 원래 불교란 그런 것이라고들 말하는데, 원래 불교가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원래 불교가 그렇다는 것은 무책임하거나 무식하거나이다.

이것은 정리되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다.

문제를 문제로 보고 있지 않으니까, 불교의 교리는 계속 혼돈과 미궁(迷宮)으로만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쓸데없는 교리 논쟁만 계속된다. 논쟁 하다가 안되면 불교는 원래 그런 것하고 방치해 버린다.

스님이나 학다들이 말하는 불교가 서로 너무 다르다. 이것은 고상한 인식론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너무 다르다. 전혀 반대되는 내용을 서로 이것이 불교라고 생각하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게서 이것을 보신다면, 상당히 어처구니 없다고 느끼시리라고 생각한다. 요새 말로, “!”이다.

 

상좌부 니까야 불전을 모두 번역해서 우리나라 불교를 크게 발전시킨 전재성 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현재 불교에는 이질적인 주장들, 잘못된 교리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것을 판별해 내고 걷어내는 일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의 대부분이 되고 말았다 기실 지금 내 이야기는 이 전박사의 말을 설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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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교리에 대한 교통정리가 없고, 상반된 교리가 그대로 인정되니까, 이른바 또라이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 불교다.

우리는 부파불교에서의 18부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부파를 남의 일로 치부하면 안된다. 무슨말이냐. “그들은 소승 또라이들이었다그렇게 치부하면 안되고, 불교의 떳떳한혹은 부끄러운역사로 그 과거를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의 교리가 오죽이나 혼란스러웠다면 부파가 18까지나 나왔겠는가.

 

지론종의 북도파와 남도파가 있는데, 그들의 주장이 판단이 서로 다르다.

그렇다면 누구 말이 옳은지 판별이 나야하는 것이다.

남도파가 옳다면 북도파는 틀리는 것이다.

(물론, 이는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問)과는 다른 것이다. 용수의 2제 중도(中道)와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기독교는 교리의 교통정리를 너무 잘하고, 너무 심하게 했다.

그래서 중앙집권적 교단이 철저히 교리를 통제하고, 정리하고, 다듬었다.

그래서 이런 획일적 교리가 심히문제가 되기도 한다. 기독교에는 이단이 너무 많다.

그런데, 불교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심하게 말하면 기독교라면 벌써, 혹은 대부분 이단이라고 했을 내용들이 불교에는 너무 오래 너무 버젓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재단 하겠는가? 부처님이 아닌 이상?

그렇다고 재단을 안할 수는 없다.

교리에 들어온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여러 잘못된 요소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서로 상반되는 내용을 인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데까지는 해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초심자들에게, 혹은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그러한 혼란을 주고 (마치 불교는 원래 그런 것처럼), 불교 아닌 것을 불교라고 하면서 커가는 이단적 교단들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렵더라도 무엇이 불교의 본의인지, 무엇이 부처님의 진리인지 판별하는 작업은 계속 필요한 것 아닌가.

스님으로서, 불교전문가로서, 수행자로서, 학자로서, 불교는 원래 그렇다는 그런 무책임한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지 교리상의 문제인식을 계속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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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람들은 옳은 교리와 잘못된 교리의 혼재 속에서, 스님이나 전문가, 혹은 수행자들이 어느것이 옳은 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불교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방치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것에 관한 논의를 5-6회에 걸쳐서 하고자 한다.

 

불교 교리 이야기니까, 관심 있으신 분만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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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윤회와 무아의 충돌

돈과 점

산하대지는 존재하는가

일체를 마음이 만드는가.

불교적 과장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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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b 신비주의

 

일단은 신비주의부터 정리하자.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또한 그래서 종교에 귀의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이나 부처님 말씀을 믿지만, 현실과 궁극적 진리 사이에는 그 간격이 너무 크다.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것에는 세가지가 있다.

 

진리의 궁극을 잘 모른다. -이것이 깨달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이 무명이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히 모르는 것이고

그것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수행이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르는 것들이 많다. 자연과학적 지식들이 그렇다.

지구 밖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인간의 세포를 만들었는지, 어째서 뇌의 수십억개의 세포

들이 그토록 질서정연하게 작용할 수 있는지,

과학에 의해서 약간 밝혀지기도 하지만, 꼭 과학적 지식이 있어야지만 인생의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또 과학이 그걸 다 알 수도 없다.

이런 것들을 대개 부처님께서는 무기(無記)라고 분류하신 것 같다.

 

③ ①도 아니고, 도 아닌 것 사이에, “신비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신비란 결국 모른다는 뜻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알려고 해야 하거나, 혹은 더 이상 알 필요가 없거나 두가지이다.

그런데, 신비주의는?

인간과 존재의 궁극적 진리신비하다고 하고, 신비 속에 안주하여 그것을, 신비를 즐긴다.

 

이게 옳은가?

신비주의란 더 이상 진리를 캐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다.

몰라도 되는 것을 신비롭게 느끼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종교적인 것, , 인간과 나와 존재의 궁극적인 진리, 그것을 신비롭다, 즉 모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결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대하는 옳은 태도가 아니다.

스스로 진리에 대한 눈을 가리고 감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비주의는 옳지 않다.

 

진리는 이거나, 이거나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알아야 하거나, 알 필요가 없거나, 두가지 뿐이다.

알아야 하지만. 더이상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신비롭다그것은 공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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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교의 교리상의 모순점들을 도전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포항공대의 강병균교수다.

그래서 나는 그의 문제제기가 의미 있다고 행각한다.

우리는 그 문제를 풀어야 하고,

그 문제에 일정한 답과 혹은 입장(立場)을 가지고 잇어야 한다.

그의 표현이나 논리가 지나치게 도발적이기 때문에

많은 스님들이 화를 내고, 흥분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의 도발이 옳다고 본다. 당연히 도발되어야 할 내용들이다.

화를 내고 흥분하는 스님들이 오히려 지적(知的)으로 태만한 것이다.

분명히 교리상에 문제점이 많은데도

그것을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빌미로 덮어버려서는 안된다.

스스로 모순되는 교리에 대해서 문제제기하지 않는 것은 지적 태만이고,

그래서는 수행도 되지 않는다.

어느 길이 옳은지 판단이 서야 열심히 그 길을 갈 것 아닌가.

어느 길이 옳은지 판단이 서야 신도들에게 지침을 제시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