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10메가가 넘쳐서 다시 계속합니다.
6조당입니다.
물론 6조 혜능스님이지요. . .
아래 사진은 입설대입니다.
즉, 2조 혜가 스님께서 밤새도록 눈을 맞으면서 서계시다가
단비(팔뚝을 자르고)를 하고, 붉은 피가 흰 눈위에 흩뿌려 졌다는 것을
특히 나타내기 위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그랬다는 의미로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 .
2조 헤가 스님께서 과연 역사적으로 그랬느냐, 그것이 역사적으로 맞는 이야기냐에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지만,
그래도 역시 혜가 스님이 "외팔이"였던 것은 역사적으로 사실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외팔이가 많았답니다)
그래도 종교는역사가 아니니까, 그분의 구도심이 그 정도였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그런 구도심을 우리느 본받아야겠지요. . .
입설대에서 절을 하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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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알 빠진 달마 상. 신발을 들고, 총령, 즉 카타코름 산맥을 넘고 게십니다.
정적들에게 살해되시고, 다시 나타나셨다는 거지요.
예수님의 부활 정도 얘기는 우리에게는 무수히 많습니다.
약사각과 서래당
약사여래 부처님
원래 중국에서도 지키는 사람들이 부처님 사진은 못 찍게 합니다.
그래도 그냥 찍지요. . . .
부처님 사진은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광포하는 일은 좋은 일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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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를 내려오면 입구쯤에 가서 공연장이 있습니다.
돈을 안 받는데, 시간을 맞추어서 기다려야 합니다.
한 30분 공연합니다
사진 찍지 말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공연 장면 사진 찍습니다
대개 다 동영상으로 녹화까지 다 합니다.
저는 (물론 사진 안 찍었지만)
거기서 계속 후래시를 터트려가면서 사진 찍는 것은
공연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당한 실례라고 생각됩니다.
공연, 그냥 하는게 아니거든요.
굉장한 내공과 정신집중을 통해서 하는 것인데,
거기다가 후래시를 계속 터트려 대다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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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까 못다 한 달마스님 이야기를 하면, (학자들이 말에 의하면)
일단 6조 헤능한테서 법맥을 이어받은 7조는 신수(神秀)대사입니다.
그당시에는 공공연하게 7조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신수 대통(大通) 대사는 엄청난 국가의 신망을 받고,
당시 측천무후의 스승으로 군림하지요.
(당나라때, 서기 700년 전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가 보적입니다.
그런데 이 보적이 법력이 약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하택 신회의 능력이 출중했거나.
암튼, 하택신회는 상당히 정치적인 분이신데. . ..
이분과 법력으로 대적해서 보적이 신회한테 지고, (소위 활대의 종론이라고 하지요)
(활대라는 곳에서- 낙양 조금 남쪽의 南陽이라는 곳입니다.)
전체 중국의 불교권력이 하택 신회한테로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신회는 6조의 법통을 자신에게 끌어드려서 스스로가 7조라고 자처하게 됩니다 .
그러나, 7조라는 이름은 워낙 오래전부터 신수 대통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므로,
스스로가, 6조단경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6조 이후에 7조라는 말은 쓰지 말라"고 6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고 각색을 한다는 거지요.
암튼, 이 이후에 약 150년 동안을 하택이 중심이 되는 하택종이 중국에서 가장 우세한 종파로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6조단경"은 대단히 많이 변형이 되구요. . .
(그렇다고 해서 6조단경의 혜능스님 말씀이 변질된 것은 아니겠지요만. . . )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만,
그 뒷 이야기도 있습니다.
"권력으로 일어선 자는 권력으로 망한다"고. . . .
하택 신회가 간 후에 하택종은 쇠망하고,
오히려 남쪽 강서성 쪽의 마조(馬祖)의 홍주종이 전 중국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조도일 스님 중심의 홍주종은 다시 법맥을 세운다고 해서
7조에 해당되는 하택 신회를 지우고,
6조-남악회양- 마조도일- 백장회해- 황벽희운-임제의현 이렇게 (지금 우리가 외우는) 법맥을 세우게 되지요.
즉 6조대사의 적손은 바로 자신의 스승인 남악회양이라는 겁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6조단경은 또한번의 손질을 거치게 되고,
하택신회의 이름은 자취를 감추고,
단 한군데 남은 것이, 맨 뒷부분에 "지해종도" (알음알이만 따르는 무리)로 나오는
"용렬한 동자승"으로만 그 자취를 남깁니다.
재미있지요?
제가 한 말씀이 아니고,
현재 학계에서 인정되는 이야기입니다.
정성본 교수님 책이나 여러 책을 보시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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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럼 달마하고 소림사하고는 무슨 관계?
달마는 소림사에 좀 들려보았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달마가 주로 소림사에서 9년면벽을 했다는 것은
주로 하택신회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그럼 왜 하필 소림사?
이 부분이 좀 중요한데. . . .
이번에 제 사진을 보더니 친구가 하는 말
"이거, 소림사가 그렇게 싶은 산중이 아니네?"
맞습니다.
소림사는 해인사보다도 덜 깊은 산중입니다 .
오히려, 해남 대흥사나, 양산 통도사쯤 됩니다.
전혀 깊은 산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협지의 내용도 뻥이지요)
다만, 이 숭산은 낙양이라는 곳이 중요합니다 .
낙양은 삼백년동안 한나라의 도읍지였고,
전통적으로 중국 역사에서 서안과 함께 대표적인 두 帝都 (제국의 왕도) 입니다.
당시에도 남조의 중심은 건업, 혹은 금릉 (지금의 남경) 혹은 항주였지만,
북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낙양입니다. 당시 낙양은 전 중국의 중심지입니다.
(나중에 당나라가 되면 서쪽의 서안으로 옮겨가지만요)
그리고 당연히 북조 불교의 중심도 낙양입니다.
전적에 나오는 낙양의 유명한 절들만해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건 낙양 시내 이야기이고,
낙양에서 산으로 가자면 (참선을 하려면 산으로 가야 하니까)
낙양에서 가장 가가운 남쪽에 있는 큰 산이
바로 숭산입니다.
그러니까 숭산 소림사가 유명한 것은,
그것이 깊은 산종이고, 산이 험해서 유명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달마스님 당시의 제국의 수도 낙양에서 가장 가까운 대표적인 산이고,
낙양에 들락거리기 가장 손쉬운 산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관악산이나 혹은 봉은사 정도 된다고나 할까요.. . . .
그래서 하택 신회는 달마스님 당시에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절이라고 생각되는 소림사를 그 150년 후에 "바로 달마스님께서
9년면벽하셨던 곳"이라고 승격시키게 됩니다.
소림사가 달마 때문에 승격되었는지,
달마스님이 소림사 때문에 더욱 유명해 지셨는지. . .어떤 쪽인지. . . .
(이 얘기도 다 책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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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게 소림사를 보고 나와서,
다시 버스 타고 등봉 숙소로 돌아와서
편하게 묵었던 숙소를 아쉽게 떠납니다.
아침에 보니까 (숙소-삥관)에 친절한 아가씨가 없어서 서운했는데,
갈 때 보니까, 있더군요.
떵펑에 더 잇고 싶은데. . . .떠납니다.
낙양으로. (뤄양 Luoyang).
시외버스 타고.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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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밤.
다행히 유스호스텔을 쉽게 찾고.
(버스에서 내려서 찾지 못해서 전화를 했더니- 영어로- bus stop바로 길 건너에 있더군요)
Longmen 롱먼 유스호스텔,
그들 말로는 롱먼칭녠뤼셔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3박을 기분 좋게 지냈지요. . . . . .
(龍門靑年旅舍)
용문 석굴 가까이에 있어서 다음날 용문석굴 가기도 좋았구요. . .
도미토리(多人房)라서. . .태국에서 온 떡두꺼비 같이 생긴 아저씨하고 한 침대에서. . .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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